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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프스 황금시대의 종결자, 그 이후의 삶은 어땠나
알프스 황금시대의 종결자, 그 이후의 삶은 어땠나
  • 이용대 코오롱등산학교 명예교장
  • 승인 2018.07.30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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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마터호른의 그림자... 에드워드 윔퍼의 생애 파헤친 전기
마터호른 전경. 사진 pixabay.
마터호른 전경. 사진 pixabay.

이 책은 국내최초로 소개되는 알프스 황금시대를 빛냈던 에드워드 윔퍼(이하 윔퍼)의 전기다. 서거 100주년에 맞춰 2011년에 출간되었고 이번에 하루재클럽에서 번역출간되었다.

윔퍼는 1840년 영국 런던에서 출생하여 1911년 향년 71세로 샤모니에서 타계하여 몽블랑이 보이는 샤모니 계곡에 묻혔다. 그의 묘비에는 저술가, 탐험가, 등반가로 살다간 인물로 기록되어 있는데 그의 생애는 바로 알프스 황금시대와 더불어 시작하여 근대등산의 기초가 굳어질 때 끝났다.

그는 엄격하고 냉정하여 접근하기가 어려운 인물로 여자에게는 관심이 없었다. 그러다 죽기 5년 전인 67세에 43살 연하의 이디스 르윈이라는 처녀와 1906년에 결혼하였다. 신혼여행은 샤모니에 머물면서 메르데 글라스에서 젊은 신부에게 빙벽등반을 가르치며 단란한 한 때를 보내기도 했으나 이후 두 사람의 가정생활은 평탄치 못했으며 1910년에 이혼한다. 그는 부부사이의 성생활에서도 난폭한 남자였다고 한다. 그는 슬하에 딸 하나를 남겼다. 그녀는 아버지의 산 마터호른을 등정하며 아버지의 뒤를 이었으며 1965년 초등 100주년 기념식에 귀빈으로 참석하기도 했다. 윔퍼는 등반과 탐험이외에도 빅토리아시대 사람답게 과학, 박물학, 지리학에도 많은 관심을 보였던 인물이다.

1890년에 촬영한 윔퍼의 초상
1890년에 촬영한 윔퍼의 초상

윔퍼하면 제일먼저 떠오르는 것이 있다. 1865년 인간이 결코 오를 수 없는 산 마터호른(4478m)을 초등하면서 알프스 황금시대의 막을 내리게 했으며 세계등반사의 무대를 알프스에서 눈의 거처로 옮겨가게 한 분수령을 만든 사람이다. 세계적인 산악명저로 꼽히는 『유럽의 놀이터』를 저술한 레슬리 스티븐은 알프스 역사를 새로 쓴 마터호른 초등은 “알프스 역사상 가장 눈부신 성과”라고 극찬했다.

근대 등반사에서 단 하나의 업적을 꼽아야한다면 언필칭(言必稱) 윔퍼의 마터호른 초등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그 주인공의 나이가 불과 25세의 젊은이였다는 사실에 한 번 더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윔퍼는 1860년 알프스를 처음 본지 5년 만에 고산등반가로서 범접하기 힘든 독보적인 명성을 쌓았다. 그가 마터호른을 처음 대했을 때의 느낌은 위풍당당하고 웅장함은 인정하지만 아름답지는 않다고 생각했으며 그 산에서 자신의 미래가 어떻게 펼쳐질지는 전혀 알지 못했다.

1865년 7월 14일 마터호른에서 윔퍼가 이룩한 명성과 승리의 기쁨은 잠시뿐이었다. 그 뒤에는 끔직한 비극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산 중 일어난 전대미문의 추락사고로 동료 4명의 처참한 죽음을 수습한 그는 하루사이에 초등의 영예와 비극을 모두 겪는다.

추락사고의 후폭풍은 매우 거셌다. 미숙한 동료 한 명이 미끄러지면서 충격이 실린 로프가 끊어지고 동료 3명이 1000미터아래의 빙하 바닥으로 줄줄이 추락한다. 이 사고는 윔퍼가 직접적인 원인제공자가 아니었으나 사람들은 산에 오르는 행위자체를 미련한 짓거리로 매도하고 윔퍼를 비난하며 맹공격을 가했다. 성취욕이 남달랐던 그가 1861년부터 1865년까지 5년에 걸쳐 칠전팔기 끝에 이룩한 결과에 대한 세간의 평가는 그를 절망의 심연으로 떨어트릴 정도로 냉혹하고 참담했다.

당시 영국의 저명한 일간지 『더 타임스』는 이 사건을 다음과 같은 내용의 사설로 다루었다. “장애물 경기를 하거나 사냥을 하다 목이 부러지는 경우는 용납할 수 있지만 산을 오르다 목이 부러지는 일은 당치도 않은 일이라고 맹비난을 퍼부었다.”

마터호른의 정상에 선 윔퍼와 끄로.
마터호른의 정상에 선 윔퍼와 끄로.

멀리서 이 산을 바라보면 주변에 다른 위성봉을 하나도 거느리지 않은 채 스위스와 이탈리아 국경에 예각의 바위피라미드를 이룬 절벽으로 우뚝서있어 조망하는 것만으로도 공포감을 자아내기에 충분한 산이다.

마터호른은 세계 5대 미봉(美峰)중에 하나로, 위용이 아름다운 산답게 그 이름도 세 가지나 된다. 마터호른의 프랑스 이름은 몽세르뱅(Mont Cervin)인데 이 산의 원래 이름은 ‘Servin’이다. 소쉬르의 잘못된 표기가 원인이 되어 이처럼 철자가 바뀐 후로 오늘날까지 그대로 쓰이고 있다. 소쉬르는 ‘Servin’이라고 써야 하는 철자를 착오를 일으켜 ‘Cervin’으로 표기했다. 이것은 오류임에도 소쉬르의 높은 명성 탓에 일반인들 사이에서 그렇게 정착된 것이다.

몽 세르뱅은 언덕이 수목으로 덮인 산봉우리라는 뜻이다. 마터호른은 독일어로 목장(Matte)의 산봉우리(Horn)란 의미다. ‘Servin’이란 지명이 기록상으로 처음 등장한 것은 1560년이다. 이탈리아에서는 몬테 체르비노(Monte cervino)로 통용되고 있다.

체르마트 산악박물관에 있는 마터호른 초등 당시 끊어진 로프.
체르마트 산악박물관에 있는 마터호른 초등 당시 끊어진 로프.

마터호른 참극 이후 윔퍼는 바다를 향한 어릴 적 꿈을 성취하고 학술적 업적을 이루기 위해 북극으로 눈을 돌렸다. 해군 중심의 북극 탐험이 행해지던 빅토리아 왕조시대에 자비로 탐험대를 꾸려 그린란드를 탐험했던 윔퍼의 발자취는 경이로울 뿐이다. 그는 1867년과 1872년 두 차례에 걸쳐 그린란드를 탐험한다. 노르웨이의 탐험가 프리드쇼프 난센의 그린란드 첫 횡단이 1888년이었음을 볼 때 윔퍼의 생각이 한발 앞섰음을 엿볼 수 있다. 비록 극북(極北)까지 도달한다는 꿈은 이룩하지 못했지만 미지의 그린란드 내륙을 관찰하는 쾌거를 이루었으며 식물화석 등 방대한 수집품을 갖고 돌아온다. 그 뒤 윔퍼는 카렐과 함께 남미 에콰도르 안데스 산군의 침보라소를 비롯하여 7개봉의 초등 업적을 남긴다. 이 원정의 가장 큰 목표도 역시 학술적인 업적을 세우는 것이었다. 그는 이 원정에서 고산증을 연구하고 지도를 만들었으며, 많은 표본을 수집한다. 이 원정에서 펴낸 보고서는 높은 평가를 받아 1892년 영국왕립지리학회가 그에게 메달을 수여한다. 윔퍼의 안데스원정은 유럽대륙을 벗어난 최초의 원정등반으로 평가된다. 이후 그는 캐나다 로키를 원정하기도 한다.

그가 이처럼 스폰서의 금전적인 지원 없이 많은 원정을 할 수 있었던 바탕에는 그가 그려내는 판화의 인기가 뒷받침했기 때문이다. 1870년대는 도서삽화의 활황기였으며 그는 삽화 수입으로 얻은 돈을 가지고 알프스와 그린란드 원정을 이룩할 수 있었다.

윔퍼의 명저 『알프스 등반기』(김영도 역)가 우리나라에서 번역된 것은 1988년이지만 이 책은 그가 마터호른에 오른 지 6년이 지난 1871년에 출간되었다. 등반사 연구가 아널드 런이 “이 책은 사람이 산에 오르는 한 계속 읽어야할 책”이라고 격찬을 보낸 것처럼 한 세기가 지난 오늘날에도 여러 나라 언어로 번역되어 산악문학의 고전으로 널리 읽히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윔퍼의 전 생애를 조명한 전기물이 발간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기록광으로 평가 받던 윔퍼의 수많은 일기와 원정일지가 남겨져 있지만 윔퍼의 유년시절부터 만년에 이르기까지 역동적인 삶을 살다간 한 사람의 일생을 이처럼 입체적으로 재현하는 데는 저자의 노고가 많았을 것이다. 저자 이언 스미스는 윔퍼의 후손들을 직접 인터뷰하고 윔퍼가 올랐던 알프스의 봉들을 오르고 미 발굴 자료와 300여 편의 참고문헌을 조사해 이 전기를 완성했다. 이언 스미스는 우리나라에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지만 보드만 태스커 산악문학상 심사위원장을 역임한 인물이다.

윔퍼는 목판화 공방 사업을 하는 집안의 차남으로 출생하여 젊은 시절부터 도제수업을 받으며 판각공으로서의 정교한 삽화를 익혀왔다. 그가 펴낸 많은 저서에는 그가 그린 정교한 삽화가 빠짐없이 등장하는데 목판화는 윔퍼의 생애 전체를 관통하는 키워드라고 해도 지나침이 없다. 오늘날 미술사적으로 재조명을 받고 있는 70컷의 사진과 수준 높은 판화를 곳곳에서 만나볼 수 있다는 것은 이 책이 주는 큰 선물이라 할 수 있다.

샤모니 공동묘지에 있는 윔퍼의 무덤.
샤모니 공동묘지에 있는 윔퍼의 무덤.

윔퍼는 노련한 자기홍보의 달인이었다. 등반가로서의 높은 명성을 얻는 바탕에는 등반기록 못지않게 필력, 언변, 그림 등이 많은 기여를 했다.

그는 저술과 그림이외도 등산장비 제작에도 뛰어난 솜씨를 발휘했다. 1970년대 한국에서 동계천막의 대명사가 된 ‘윔퍼 텐트’도 그가 완성했다. 1860년대 기준으로 볼 때 그가 만든 텐트는 설치가 편리하고 8Kg의 무게를 지닌 가벼운 텐트였다. 당시 윔퍼 텐트는 원정용 장비로 인기가 높아 한 회사에서 양산에 돌입하기도 했다.

이 책의 저자는 윔퍼와 동료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갈등관계도 세밀하게 파헤치고 있다. 특히 여러 차례 등반을 함께한 샤모니 가이드 미셀 크로(Michel Croz)의 죽음에 큰 회한을 느꼈다고 했으며, 마터호른 참사 때 사고 수습을 위해 최선을 다한 그는 평생 자신의 책임을 통감한다고 했다. 특히 마터호른 초등경쟁에서 3일 늦게 이탈리아 능선으로 정상에 올라 윔퍼에게 참패를 당한 이탈리아 경쟁자 장 앙투앙 카렐(J.A Carrel)과의 불편한 관계를 씻고 1880년 안데스를 원정하여 침보라조를 함께 등반하는 등 우정을 회복한 일은 감격적인 일화다.

이 책의 1부 5장에는 몽블랑 등정사에 의문의 여지를 남길 수 있는 내용이 실려 있다. 몽블랑 첫 등정은 1786년 자크 발마와 빠가르 두 사람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 다음해인 1787년엔 드 소쉬르에 의해 두 번째 등정이 이루어진다. 이 두 번의 등정은 역사적으로 엄연한 사실로 기록되고 있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두 번째 등정자인 드 소쉬르가 제3등을 달성한 것으로 소개하고 있다. 이점은 저자의 착오에 연유한 것인지 아니면 등반대 순위가 아닌 등정자 순위별로 기술한 것인지 그 점이 모호하다. 즉 1등과 2등은 발마와 빠가르, 제3등은 소쉬르라는 해석이 될 수 있다.

이 책의 첫머리 ‘그의 산’에서는 푸르겐 리지를 여러 차례 도전한 곡예등반가이자 작가인 귀도레이가 평소 존경하던 윔퍼와 우연하게 만나는 감격스런 장면이 소개되고 있다.

역시 고수만이 고수를 알아보는 것이다. 윔퍼는 마터호른을 떠나 30년이 흐른 뒤 자신에게 명성을 가져다준 이산을 다시 찾았을 때의 일이다. 그곳엔 옛 동료들은 아무도 없었으며 혈기왕성했던 젊은 날 자신이 이룩한 대담한 몸짓들을 회상하며 마터호른을 바라보고 서있었다. 그때 마침 이곳을 지나던 귀도레이는 윔퍼와 우연하게 조우한다. 귀도레이는 윔퍼와 만났을 당시를 회상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윔퍼를 보고 내가 받은 감동은 뭐라 표현할 수가 없다. 그는 단지 한 인간의 모습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닮기를 꿈꿔 온 완벽한 등반가의 이상적인 모습 그 자체가 그곳에 있었다. 마터호른과 윔퍼 거대한 두 맞수가 서로 마주한 모습은 무릎 끓은 거인 앞에 선 작은 정복자의 위대함을 새삼 절절히 느끼게 해주었다.”

윔퍼는 당대의 저명인사들과 폭 넓은 교류를 해오며 친분을 쌓아왔다. 체르마트의 한 호텔에서 영국의 전기 작가이자 비평가로 『유럽의 놀이터』를 저술해 산악문학에 공헌한 레슬리 스티븐을 만나 평생 존경하는 사이로 발전한다. 레슬리스티븐은 여류 소설가 버지니아 울프의 아버지이자 알프스 황금기에 맹활약을 했던 등산가다. 이밖에도 ‘산악사진의 아버지’로 손꼽히는 사진작가 비토리오 셀라, 알프스를 알리는데 크게 기여한 사실주의 산악화가 가브리엘 로페, 『캉첸중가 일주』를 저술하고 몽블랑 초등자 파가르의 초등정 의혹의 진상을 규명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프레쉬 필드 등이 그와 가까웠던 인물들이다.

700여 쪽 분량의 이 책을 독파한다는 것은 상당한 노고가 따르겠지만 불분명했던 윔퍼의 전 생애를 살펴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될 것이라 믿으며 일독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