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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거품 빠진 산
[칼럼] 거품 빠진 산
  • 오영훈 미국통신원
  • 승인 2018.08.21 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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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평론을 주로 쓰는 성공회대의 정윤수 교수가 최근 산악인들에게 이런 글을 썼다.

그런 곳! 인간이 도저히 오르기 힘든 곳, 아마도 날카로운 바람과 무서운 눈이 엄습하고 햇빛조차 공포스러운 그곳! 누구나 오를 수 없기에 당연히 주목받아 마땅한 고봉! 신의 선택에 의하여 극소수의 한 명으로 그런 곳에 발을 디딘 사람이라면 '한국인의 기상'같은 판에 박은 말보다는 그 누구도 보지 못했고 듣지 못했고 디디지 못한 그 곳의 공기와 풍경의 압도적인 세계를 한마디라도 말해줄 만하지 않은가. 국내의 이렇다 할 산도 제대로 올라가보지 못한 나는 그 아득한 히말라야 고봉을 오른 사람들로부터 경이적이고 숭고한 그 높은 세계에 대해 듣고 싶었다. 그러나 좀처럼 듣기 어려웠다. 그게 아쉬웠다. (정윤수의 '서문이라도 읽자': 에릭 더닝의 <스포츠의 문명화>와 한스 굼브레히티의 <매혹과 열광>. <주간경향> 1264호. 2018년 2월 13일, 60-61쪽)

신이 이미 죽었음을 모르는 이가 여기에도 또 한 명 있구나. 아직까지 산악인이 오르는 곳을 ‘경이적이고 숭고한 그 높은 세계’로 보는 이가 있다니. 산의 거품은 이미 빠질 대로 빠졌다. 남은 것은 거품의 잔상일 뿐. 그러나 그도 산을 올라보면 알게 될지 모른다. 거품은 가고 초라할지는 몰라도 거친 알맹이가 저기 이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을.

산에 거품이 빠져간다. 우이동 골목이 한산하고, 바위 사이사이에 발길은 뜸하다. 60년대 이후 줄곧 상승곡선을 그렸던 등산이 이제 비로소 내리막길을 걷는다. 매장은 문을 닫고, 장비점은 커피집으로 바뀐다. 등반은 도심으로 내려와 스포츠로 유례없는 인기를 끌지만, 산과 계곡의 거친 바위는 근자에 없던 고요를 되찾는다. ‘등산은 스포츠가 아니다’는 말은 편견에 지나지 않는 게 아니다.

제일 먼저 사라져 갔던 것은 ‘왕좌’다. 동방의 작은 나라를 ‘세계의 정상에 우뚝’ 세웠던 고상돈으로부터, 엄, 박, 한의 14좌 시리즈, 고미영과 오은선의 여성 최초 14좌, 이어 ‘알파인 스타일 상주기’까지 이어져왔던, 이들이 바꿔 가며 앉아왔던 영예란 이미 조각나 흩어졌다.

IMF이후론 계속된 불황으로 너도 나도 호주머니까지 옹색해졌다. 돈과 명예가 사라진 산에는 다들 등을 돌렸다. 해외 고산등반 원정대만이 아니다. ‘똥짐’지고 어렵고 위험한 일에 따르던 경애의 시선따위 없어진 지 오래다. 손을 젓고 다들 내려간다. 빠르고 쉬우며 익스트림에 몸매도 과시하는 유튜브형 클라이밍은 산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왕좌와 권력이 빠진다고 모든 게 먼지처럼 흩어져 없어지는 건 아니다. 눈을 씻고 난 사람들은 벌거벗은 산을 비로소 야생의 품으로 보기 시작했다.

‘성과’가 아닌 그토록 찾아 헤매던 ‘과정’이라는 등산의 실체가 이제 민낯으로 드러나고 있다. 최근 10여 년, 작지만 제 등반을 나서는 큰 몸짓들이 있었다. 최석문의 공감 시리즈 원정대, 김창호의 코리안 웨이 시리즈, 랑탕원더러스와 곧 출국하는 알라메딘원더러스 따위다.

이들 모두에게 화두는 스타일이 아니라 등반의 진정성에 있다. 이들의 크고 작은 등반이 우리에게 호소하는 파급력과 영감의 크기는 후대만이 제대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젊은 마음들에 가만히 호소하는 것이다. 진짜 산을 찾아라!

이들의 산을 향한 방랑은 그들이 오르려는 정상에 그 목적이 있지 않다. 시리도록 걷는 발걸음 하나 하나, 이를 먹고 씹고 토해내고 돌아와 나눠주는 손짓 모든 곳곳이 바로 그들이 산을 오르는 목적 자체다. 산을 살고자 하는 욕구다. 다시 돌아와야 할 도시를 알지만, 도시에 진짜 야생의 등반의 숨결을 옮겨오고 싶은 몸짓들이다. 거품이 빠진 곳에 찾아들 알맹이의 산이 그래서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