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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 보닝턴 11년 만에 한국 다시 찾는다
크리스 보닝턴 11년 만에 한국 다시 찾는다
  • 이영준 기자
  • 승인 2018.08.22 18:4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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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주세계산악영화제 초청, 산악문화상 수상
7일 기자회견, 8일 강연회 등 일정
2007년 방한해 북한산을 찾았던 크리스 보닝턴 경이 11년 만에 다시 한국에 온다.
2007년 방한해 북한산을 찾았던 크리스 보닝턴 경이 11년 만에 다시 한국에 온다.

영국 산악인 크리스 보닝턴 경(84)이 2007년 12월 이후 11년 만에 다시 한국을 찾는다.

울주세계산악영화제 초청으로 방한하는 크리스 보닝턴 경은 제3회 울주세계산악문화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미래지향적 등반을 추구한 최초의 프로 산악인으로 평가 받는 보닝턴 경은 1951년부터 등산을 시작해 평생을 탐험과 도전을 해온 공로로 영국 왕실로부터 1996년 기사 작위를 받았다. 

이번 방한은 9월 7일 오후 1시부터 핸드프린팅 행사와 기자회견, 8일 오후 4시부터 특별강연, 9일 오전 10시부터 영화 <크리스 보닝턴-산악인> 상영과 함께 영화제 기간 중 사진과 영상자료 특별전시 등의 일정으로 진행된다.  

한편 크리스 보닝턴 경은 1970년 안나푸르나 남벽, 1975년 에베레스트 남서벽 원정대 대장으로 현대 히말라야 등반에 고산거벽이라는 새로운 전기를 불러 일으켰다.  

이번 방한에 맞춰 그의 책 <어센트>도 하루재클럽에서 발간 예정이다.

아래는 2007년 방한 당시 기자의 인터뷰 전문

 

크리스 보닝턴

50년 세월에도 넘지 못한 ‘가없는 지평선’

백발의 그가 우이동에 나타났다. 하얀 수염과 하얀 머리칼, 그보다 더 하얗게 빛나는 인수봉을 쳐다보는 그의 모습은 멀리서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와의 거리를 100m쯤 남겨두었을 때, 문득 이태리 산악인 귀도 레이가 알프스 마터호른의 산록에서 그 산의 초등자 에드워드 윔퍼를 마주쳤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젊은 귀도 레이가 초로의 윔퍼를 알지 못한 채 가벼운 인사만 나누고 지나치자, 가이드가 “저 분이 윔퍼”라고 알려주었고 그제야 경외에 찬 마음으로 돌아보았던 그가 훗날 “그때 내가 본 것은 단지 사람의 모습이 아니라 등산가의 이상형이었다”고 술회했던 것 말이다.

적어도 등산의 세계에 발 담그고 있는 사람이라면 한번쯤 들어보았을 이름, 크리스 보닝턴(Sir Chris Bonington). 그와의 대면을 앞두고 나는 한 사람의 산쟁이로서 전날부터 마구 설레는 마음이 들었지만, 기자로서의 균형감각에 대한 이런 저런 고민도 함께 가질 수 밖에 없었다.

그건 마치 이제 막 데생을 끝낸 무명의 화가가 길을 가다 말년의 피카소를 만났고, 그가 장황히 이야기한 입체파 미술 사조에 대해 길거리에 지나는 다른 누군가에게 설명해 이해시켜야 하는 상황과도 같았다. 그래서 나는 보닝턴의 전기 <하이 어치버(High achiever)>에 사인을 받으며 첫 질문을 이렇게 던졌다.

“당신이 정말 알피니즘의 전설이라고 생각합니까?”

“천만에요. 그건 언론의 과찬이죠.”

그렇다면 다행이다. 보닝턴이 지난 50여년간 첨예한 등반을 직접 하거나 대장으로 팀을 이끌며 히말라야를 포함한 지구의 수많은 산을 두루 섭렵했다는 사실은 인터넷 검색만 해보면 알 수 있는 것이다. 그중에 안나푸르나 남벽이 있고, 에베레스트 남서벽이 있고, 눕체, 파이네, 오거, 쉬블링, 콩구르, 창가방, 멘룽체, 드락낭 리 등 무수한 봉우리들이 있지만, 그 이름조차 외우기 힘든 생소한 산들을 늘어놓고 “이 사람은 용감하고 첨예한 등반 끝에 영국 여왕으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았고, 그래서 알피니즘의 전설이며 우리도 배울게 많다”는 찬양을 보낸대야 길을 가는 그대에게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산은 산을 통해서 배워야 한다”

천천히 오투월드의 암빙장을 둘러본 보닝턴은 사람들에 둘러싸여 산으로 걸음을 옮겼다. 1934년생인 그는 어쩌면 일찌감치 등산을 접었을 나이지만 여전히 건재해 보였다. 적당히 무거운 배낭을 메고서도 리듬감이 느껴지는 걸음걸이에서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오랜 산력이 느껴졌다.

“날씨는 등산에 미치는 여러 요소 중 하나인데, 오늘 날이 참 맑아서 기분이 좋아요. 인수봉을 보자마자 클라이밍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암벽에는 볼트가 박혀 있나요? 그 볼트가 클라이밍을 할 때 난이도를 낮추는 용도로는 사용되지 않나요?”

지극히 영국인다운 말들이었다. 오래도록 등반과 탐험에서 전통을 자랑해 온 영국은 전통적인 암벽등반에서 볼트 사용을 극히 꺼린다. 그건 일종의 자존심의 문제와도 같은 것인데, ‘정당한 방법(by fair means)’으로 나타나는 머메리즘을 잇는 것이 확보물 사용의 제한에서 온다고 믿는 까닭이다.

처음의 영국 산악인들은 산을 오르며 로프도 크램폰도 하켄도 사용하기를 꺼렸었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의 영국인들이 첨예한 스포츠클라이밍을 하지 않는 것도 아니요, 보닝턴 또한 막대한 물자와 인력을 동원해 극지법으로 여러 고산을 오른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그는 “요즘 영국에도 스포츠클라이밍을 통해 산에 입문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지만 산은 산을 통해서 배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렇다면 그의 말은 결국 산을 통해 부와 명예를 모두 얻은 자의 논리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고산등반을 하며 셰르파를 사용하고 고정로프를 깔고 장비와 식량을 버려두고 오는 것이 바른 일은 아니지만, 적어도 죽는 것보다는 나으니까요. 그게 어려운 일이기는 하지만, 산은 혀끝으로만 오를 수는 없죠.”

그에게 안나푸르나 남벽과 에베레스트 남서벽에서의 전형적인 극지법과 셰르파·산소 사용에 대해 물었을 때 돌아온 대답은 이러했다. 이런 보닝턴의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는 것이, 그는 누가 봐도 우리 시대의 알피니즘에 대해 가장 많은 공부를 하고 고민을 한 사람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가 등산을 시작한 이래 지금까지 집필한 책은 등반보고서부터 시작해 알피니즘의 역사를 두루 넘나드는 14권이나 되며, 감수하거나 편집한 출판물까지 합하면 수십 권이 넘는다. 단순히 양질의 전환으로 생각해 봐도 이런 필력을 뒷받침해 온 지식과 지혜는 하루아침에 쌓인 것이 아닐 테다.

“<알파인 저널>(영국산악회 연감)을 통해서 한국의 등반활동에 대해 알고 있었습니다. 한국 산악인들의 성향은 매우 도전적이고 모험적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앞으로 많은 대상지에서 활약할 것 같습니다.”

보닝턴은 이날 북한산 영봉까지 함께 산행한 엄홍길씨와도 1993년 산악영화를 만들며 네팔 카트만두를 방문했을 때 만난 적이 있다고 했다. 하지만 그가 8000m급 봉우리를 16개나 올랐다는 사실은 이날 처음 알았다고 했다.

 

‘히말라얀 리더십’ 상징 된 에베레스트 남서벽

“제가 안나푸르나 남벽 원정대를 꾸렸던 1970년은 알피니즘의 역사에서 참 의미 깊은 해인 것 같습니다. 메스너 형제가 낭가 파르바트 루팔 벽을 올랐고 일본대가 에베레스트 남서벽에 도전했습니다. 이 세 등반을 계기로 히말라야 등반이 전환기를 맞았다고 생각합니다.”

하루재에 올라 더욱 가까이 다가온 인수봉을 보며 보닝턴은 잠시 회상에 잠겼다. 그가 처음 등반을 시작했던 시기는 제2차 세계대전의 화약 냄새가 아직 남아있던 1951년이었다. “그때 처음 신었던 등산화에는 징이 박혀있었다”고 기억하는 보닝턴은 “당시에는 산악운동이 모험적일 수 밖에 없었고 나 또한 평생 그런 영향 속에 산을 올라왔다”고 말했다.

보닝턴이 처음 오른 산은 할아버지와 함께 오른, 200여m밖에 되지 않는 동네 뒷산이었다.

가장 인상에 남는 산이 어디냐는 질문에 그는 “지금까지 등반은 모두 각각의 다른 상황과 다른 위험이 있었다”며 “가장 도전적이면서도 리더십을 요구했던 등반은 에베레스트 남서벽이고 가장 어려웠던 등반은 오거”라고 대답했다.

에베레스트 남서벽을 오르며 대원 16명과 고소포터 33명, 셰르파 26명 등 75명의 대부대를 이끌었던 보닝턴은 등정 성공 이후 ‘크리스 보닝턴 사단’이라는 별명과 함께 ‘히말라얀 리더십’의 상징처럼 평가 받았다. 당시 그가 고안한 박스텐트는 이후 남서벽을 시도한 수많은 원정대가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으며, 이후 저술한 <에베레스트 더 하드 웨이(Everest the hard way)>는 히말라야 거벽등반을 꿈꾸는 이들에게 바이블처럼 여겨졌다.

그의 리더십은 지금까지 원정대의 조직과 운영방식에 회자되곤 한다. 그때까지의 히말라야 원정대를 보면 대장의 역할은 베이스캠프에 머물며 대원들을 지시하고 독려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보닝턴은 직접 2캠프까지 짐을 져 나르며 대원들과 함께 했고 민주적인 절차와 방식을 존중해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 때 꼭 회의를 거쳤다. 그 결과가 대원의 심리에 어떤 영향을 줄 것인가까지 생각했던 ‘대장 보닝턴’을 대원들은 존경하게 되었고 이후 여러 등반에서도 함께 하게 된다.

“훌륭한 리더가 되려면 목표에 대한 뚜렷한 비전이 있어야 합니다. 나의 목표를 구성원들에게 잘 이해시키고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것도 필요하겠지요. 저는 대원들의 능력과 의견을 존중하고 믿습니다. 신뢰가 없다면 그들을 움직일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가 단지 리더로서만 대규모 원정대를 꾸려 성공했다면 지금과 같은 명예는 반쪽이 되었을는지도 모른다. 보닝턴은 한 사람의 알피니스트로서 스스로의 한계에 도전해 왔다. 그 절정이 바로 1977년 초등한 오거(Ogre·7285m) 등반이다.

“저는 지금까지 제가 생각하는 가장 어려운 등반을 시도해 왔습니다. 그중 성공한 것도 있고 물론 실패한 것도 많아요.”

바인타브락이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는 카라코룸 히말라야의 오거는 보닝턴의 등정 이후 20년이 지날 때까지 재등이 이루어지지 않은 난봉이다. 에베레스트 남서벽 이후 등정 대원이던 더그 스코트가 꾸린 원정대에 보닝턴은 역할을 바꿔 대원으로 참가했었다. 단 6명으로 구성된 소규모였다.

 

“내 인생 모든 것은 등산이라는 과정의 일부일 뿐”

“그저 즐긴다는 기분으로 떠났어요. 그게 죽음의 문턱까지 가게 될 줄은 몰랐죠.”

더그 스코트와 함께 조를 이뤘던 보닝턴은 어렵사리 정상에 섰지만 하산을 시작하며 스코트가 추락해 두 다리가 부러지고 만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스코트를 부축하고 내려오던 보닝턴도 추락해 갈비뼈가 여러 개 부러지고 둘은 생과 사의 갈림길에 서게 되는데.

“등산은 어차피 위험한 게임입니다. 자신의 경험과 기술로 이런 위험을 줄여나가는데 등산의 의미가 있죠. 죽음의 문턱까지 가는 것, 그게 바로 등산입니다. 저는 지금도 스코트와 함께 줄을 묶고 암벽에 올라갑니다. 그는 정말 좋은 친구예요.”

두 사람은 베이스캠프까지 내려오는데 4일이 걸렸고, 두 팔로 기어 내려오는 내내 아무 것도 먹지 못했다.

그가 ‘가없는 지평선(Boundless Horizon)’이라는 주제로 강연회를 마치기까지 기다린 뒤 나는 어렵게 단독 인터뷰를 할 수 있었다.

“메스너와 비슷한 시대에 히말라야 등반을 했는데, 8000m 14좌를 오를 생각은 없었습니까?”

“전혀요. 저는 남이 안간 길을 더 가고 싶었습니다. 그곳이 꼭 히말라야가 아니더라도.”

“버그하우스로부터 후원을 받으며 돈을 많이 벌었나요?”(그는 당시 버그하우스 명예회장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국내 론칭한 이랜드의 초청으로 한국에 왔다).

“그 전보다는 분명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졌지요. 하지만 그것이 제 산행의 목표는 아닙니다. 또한 저는 지난 20여년간 다른 후원사와의 계약은 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 그게 의리죠.”

“젊었을 때 군인이었다고 들었는데, 왜 그만 뒀습니까?”

“산이 더 좋았으니까요. 군대를 나와서 유니레버사의 마가린 영업사원으로 취직했었어요. 하지만 9개월 만에 다시 그만 뒀죠. 본격적으로 산에 다녀야겠다는 생각을 한 건 1962년 아이거 북벽을 오르고 나서입니다. 그때 주변에서는 가이드가 되라고 권했지만 그것도 내키지 않았어요. 가이드는 언제든 산에 갈수는 있지만 정작 내가 원하는 산에 갈 수는 없기 때문이었죠.”

“가족과 자식들이 산에 간다고 하면 어때요?”

“좋아요. 제 남동생과 아들을 데리고 킬리만자로와 티베트의 고산을 등반하기도 했어요. 그들이 위험한 산행을 한다고 해서 걱정하기 이전에, 그들 자신의 인생이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격려하고 싶습니다.”

“함께 등반하다 죽은 동료들을 생각하면 어떻습니까?”

보닝턴은 지금까지 그와 줄을 묶었던 사람 중 존 할린, 토니 티게, 피터 보드맨, 조 태스커, 닉 에스코트, 돈 윌란스, 알렉스 맥킨타이어 등 알피니즘의 역사에 남을만한 숱한 산꾼들을 산에서, 또는 여러 이유로 잃었다.

“소중한 친구를 잃었을 때 정말 참담한 기분이 듭니다. 특히 저와 함께 한 원정에서 그런 일이 일어났을 때 그 소식을 가족에게 전해야 하는 것은 힘든 일입니다. 제가 죽을 때까지 그들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원정등반이 전장에 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래서 그 마저도 나를 확실히 강하게 합니다. 그 또한 산을 오르는 일부입니다.”

보닝턴의 대답은 “죽음도 삶의 일부”라며 달관한 선승의 대답과 같았다. 그는 정확히 “One never quite hardens up to it”이라고 말했다. 마치 허들 선수가 달리는 중 부딪혀 허들이 넘어지고 정강이에 멍이 들 순 있지만, 그 또한 그 경기의 한 가지 룰인 것처럼.

그래서 그는 다시 산으로 갔는지 모른다. 보닝턴은 피터 보드맨과 조 태스커가 실종됐던 82년 에베레스트 북동릉 원정을 마치고 쓴 책 <에베레스트 더 언 클라임드 리지(Everest the Unclimbed Ridge)>에서 “다시는 에베레스트에 가지 않겠다. 나의 아내와도 약속했다”고 말했지만 불과 3년 후 노르웨이 원정대의 초청으로 에베레스트 정상에 섰다. 그의 나이 51세 때였다.

“가족들이 싫어하진 않았습니까?”

“원정을 떠난다고 하면 걱정하죠. 62년에 결혼했는데 그 뒤로 집에서 고기를 얻어먹은 적이 없어요(웃음).(보닝턴의 부인 웬디 여사는 채식주의자다). 집에 돌아오면 보다 세심히 가정을 돌보려고 노력합니다. 그래서 동생, 아들과도 등반을 한 것이고요. 앞으로도 쉬운 대상지에서 가족과 함께하는 산행을 하고 싶어요.”

“언제까지 산에 오를 생각입니까?”

나는 이 질문을 던지고 곧바로 후회했다. 그건 물어볼 필요조차 없는 정말 바보 같은 질문이었기 때문이다.

“죽는 날까지.”

오늘 이 노 알피니스트와의 짧은 만남을 나는 훗날 “그때 내가 본 것은 단지 사람의 모습이 아니라 등산가의 이상형이었다”고 똑같이 적을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