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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철, 어느 짧은 여행의 기록
최승철, 어느 짧은 여행의 기록
  • 이영준 기자, 사진 손재식 사진작가․김점숙․김동우 제공
  • 승인 2018.09.27 1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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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9월 28일 인도 가르왈 히말의 탈레이 사가르(6904m) 북벽에서 신상만, 최승철, 김형진 세 사람이 정상을 앞두고 의문의 추락을 했다. 그들의 20주기를 맞아 10년 전인 2008년 9월 최승철의 삶을 조명했던 기사를 다시 싣는다. -편집자 주

 

최승철의 낡은 밴 승용차는 늘 오른쪽 백미러가 없는 채로 굴러다녔다. 어딘가에 부딪쳐 깨져 테이프로 대충 얽어맸지만 이내 떨어져 덜렁거리다가 아예 잃어버린 것이었다. 수리를 해야 되지 않느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그는 늘 대수롭지 않다는 반응이었다. 승철은 꼭 “나는 좌회전만 해도 원하는 곳에 갈 수 있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벽은 그에게 삶이었다. 가장 가파른 그 끝을 향해 좌회전으로 일관하던 생은 1998년 9월 28일 탈레이 사가르 북벽에서 1300m를 추락, 최승철은 그렇게 만 스물여덟의 짧은 생을 마쳤다. 이제 그가 우리 곁을 떠난 지 꼭 10년, 하지만 아직 그를 잊어야 할 이유는 없다.

최승철 ▶1970 경기 양주 출생 ▶1986 암벽등반 입문 ▶1989 의정부 공업고등학교 건축과 졸업 ▶1992 전국암벽순례 ▶1993 설악산 토왕성폭, 소토왕폭, 대승폭 등반, 불곡산 골수암 개척 ▶1994 설악산 토왕성폭 랑데부 단독등반․대산련 경기북부 주관 회장배 암벽등반대회 우승․설악산 장군봉 기정길(5.11d) 개척․엘캡 트리플 다이렉트(VI 5.10 A3) 등반․엘캡 엑스칼리버(VI 5.11 A4) 단독등반․하프돔 다이렉트 노스웨스트 페이스(VI 5.10 A3) 등반․1995 도봉산 선인봉 쇼생크(5.11d) 개척․▶1996 엘캡 노즈 국내 최초 당일등반․엘캡 로스트 인 아메리카(VI 5.10 A5) 등반․엘캡 하트+선키스트(VI 5.10 A4) 등반․설악산 갱기폭 좌벽 웅조철진(A3) 개척․설악산 소승폭 우벽 허큘리스(A3) 개척 ▶1997 엘캡 오로라(VI 5.10 A5) 등반 후 패러글라이딩 하강․파키스탄 그레이트 트랑고 타워 코리아 환타지(VI 5.10 A4) 개척․익스트림라이더등산학교 개교 ▶1998 설악산 개토왕폭 자유등반․캐나다 부가부 인함즈웨이 등반․인도 탈레이 사가르 북벽 직등루트 등반 후 신상만․김형진과 추락사

언젠가 꿈을 꾸었다. 전날 술자리에서 그들을 떠올린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도 꿈의 배경은 인도 가르왈 히말라야의 험봉 탈레이 사가르 정상설원이었고, 그곳엔 내가 아는 세 명의 악우들이 서로 로프를 묶고 마지막 남은 몇 발자국을 옮기고 있었다. 꿈속에서 나는 그들의 추락을 보지 못했다. 다만 화이트 아웃 속에 끝이 보이지 않는 정상과 희박한 공기를 가르는 거친 숨소리만 끊임없이 들렸을 뿐이다.

최승철은 산을 오르고 있었고, 늘 그렇듯 거기에 충실했다. 그럴 때면 항상 무릎이 아팠다. 그것이 자신이 산을 만나게 된 이후 단 하루도 멈추지 않았던 성장통이라는 건 그 자신도 알지 못했다.

 

클라리넷 불던 봄날 산으로 갔다

최승철이 처음 산으로 향하게 된 계기가 무엇인지, 어떤 유년기를 보냈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2남 1녀 중 둘째라고 했으니 뚜렷한 명암이 없던 시절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1986년 의정부공업고등학교 건축과에 입학하고 밴드부원으로 활동하며 클라리넷을 불던 어느 봄날 그는 산으로 갔다고 했다. 여느 산쟁이들의 경우처럼 그도 도봉산 주변이나 종로의 장비점을 기웃거리다가 선배들에게 ‘주움’을 당했는지도 모른다. 승철이 처음 함께 줄을 묶었던 팀은 의정부에서 활동하던 ‘아름다운산악회’로, 주로 선인봉을 무대로 삼던 ‘선인파’였다.

그가 처음부터 바위와 얼음에서 남다른 두각을 보였던 것은 아니었다. 운동신경이 둔했던 그는 늘 선배들로부터 꾸지람을 당했고, 무수히 추락했으며 후일 그의 성격이 데카당트(Decadent)하다고 평가되어지는 이면과 달리 야영장에서 당연한 듯 선배의 술 심부름을 했던 시절이 있었다. 당시 함께 했던 사람들은 “최승철은 조금 불합리하다고 생각되는 일에도 별다른 불만을 내색하지 않고 묵묵히 제 할 일을 했다”고 기억했다.

89년 학교를 졸업한 승철은 자격증 몇 개를 손에 얻고 의정부 부대찌개 골목 부근에 있던 건축사 사무실에 취직하게 된다. 하루 종일 제도판 앞에서 팔 토시를 차고 도면을 그리던 그는 토요일이면 배낭을 꾸려 출근하곤 했다. 고등학교 후배 김동우씨는 “산에서 보던 것과 다르게 직장에서 일하는 그의 모습은 의외로 주어진 환경에 잘 적응하고 있는 것 같았다. 산과 클라리넷밖에 모르던 그가 자격증을 여러 개 딸 정도로 공부를 한걸 보면 어디든 집요하게 매달리는 성격이었던 것 같다”고 기억했다.

허나, 그렇게 평범한 직장인이 되어가고 주말을 기다려 바위를 오르는 산꾼 최승철은 오래 가지 않았다. 부인 김점숙씨에게는 다니던 직장을 갑자기 그만 둔 이유에 대해 어느 날 회식자리에서 사람들이 2차로 ‘방석집’에 가는 것을 보고 바로 다음 날 사표를 낼 수 밖에 없었다고 말했지만, 어찌되었든 그는 이제 세상으로부터 출가해 자신을 내맡겨야 할 곳이 산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당시 수유리에 있던 사레와 장비점 한켠의 인공암장을 오르기 위해 승철은 매일 버스에 몸을 실었다. 이제 막 우리나라에서 인공암벽 등반이 시작되는 때였다. 버스에서 그는 꼭 손잡이를 한 손가락으로만 잡고 뒤꿈치도 살짝 든 채로 서 가며 짧은 시간도 허투루 보내지 않았다.

전통적인 산악회의 품은 승철에게 점점 좁은 곳이 되어갔다. 후일 ‘백산회’로 이름을 바꾼 모산악회에서 선후배들과의 활동을 이어가기는 하지만, 시야가 넓어질수록 그는 자신을 옭매는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어 했는지도 모른다.

정승권이라는 불세출의 등반가를 만난 건 승철의 낡은 차에서 오른쪽 백미러를 떨어져나가게 하는 계기가 된 것과 같았다. 승철의 마지막 순간을 지켜봤던 손재식씨는 앳되던 시절 가래비 빙장에서 김점숙씨와 함께 정승권씨에게 빙벽등반을 배우던 최승철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의 책 <하늘 오르는 길>에는 정승권과 최승철의 첫 만남이 이렇게 적혀있다.

‘어느 날 선인봉에서 발목을 다친 승권은 수유리로 내려와 의정부 행 버스를 기다리던 중 우연히 승철과 마주쳤다. 멋쩍게 인사를 나누고 난 뒤에 승권은 버스에 올랐다. 그런데 몸이 불편한 그를 혼자 보내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에 승철도 말없이 승권을 따라 버스에 탔다.’

최승철이 정승권으로부터 얻은 건 순수하게 산으로 일상을 살아내는 법에 대한 고민이었다. 1990년 정승권씨가 자신의 이름을 따 국내 처음으로 만든 등산학교에서 강사로 활동하기도 했던 승철은 곧 군에 입대하고 고민은 잠시 연병장의 구령 소리에 묻어둔다.

 

세상과 또 다른 세상의 외줄 위에서

까까머리로 다시 세상에 나왔을 때 승철의 나이 스물 셋이었다. 달라진 건 없었다. 여전히 선인봉은 그 자리에 있었고, 사람들의 일상도 마찬가지. 승철은 문득 배낭을 메고 집을 나선다. 허나 혼자가 아니었다. 함께 쌀 한 말을 지고 주유천하 전국을 누비는 곁에는 그보다 세 살 어린 후배 김형진이 있었다. 김동우씨는 이렇게 기억한다.

“승철 형은 항상 파트너를 찾고 싶어 했어요. 제게도 줄곧 함께 등반을 하지 않겠느냐고 꼬드기며 꼭 어려운 바위만 골라 찾아다녔죠. 그의 목표가 도봉산이나 설악산에 있지 않다는 걸 알았어요. 그때만 해도 큰 벽을 오른다는 게 마음으로만 되는 게 아니라서 저는 곧 생각을 접었죠. 그리고 형은 형진이를 만나 전국암장순례를 떠난 거죠.”

스무 살 치기에 두려움이 있었으랴. 비 내리는 날 어느 시골 역 처마 밑에서 비박을 하며 둘은 아이거 북벽 죽음의 비박을 생각했을 테고, 고난도 루트에서 매달리고 떨어지며 트랑고타워를 자유등반으로 오르려던 볼프강 궐리히의 아크로배틱한 몸짓을 떠올렸으리라. 꾀죄죄한 모습으로 돌아온 승철의 마음에는 이제 더 이상 세상과 산 사이의 저울질이 없었을까.

김형진은 곧 군에 입대하고 그동안 승철은 여러 가지 궁리를 하며 지내고 있었다. 그 동안 요세미티로 날아가 자신이 생각해 왔던 거벽인공등반에 대해 여러 가지 실험을 해보기도 했고, 스포츠클라이밍대회에 출전해보기도 했다. A4급 루트 엘캡 엑스칼리버를 단독등반하며 승철은 이렇게 다짐한다. 당시 그가 넘어서고 싶었던 가장 큰 벽은 고독이었는지도 모른다.

‘앞으로 살아갈 날과 등반해야 할 곳이 너무나도 많은데 여기서 포기하면 모든 것이 끝이다.’

정승권․홍석민씨와 함께 국산 인공홀드를 만든 것도 그때가 처음이다. 최승철은 항상 팽팽한 외줄에 오르기를 기다리며 삶의 이쪽과 저쪽을 가늠질 했으나, 일단 그 위에 올라서면 더 이상 고민하지 않았다.

설악산 장군봉에 낸 루트에는 부모님의 이름에서 한 글자씩을 따 ‘기정길’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기정길 루트 출발지점에 그가 박아놓은 동판에는 이런 글귀가 쓰여 있다.

‘나의 부모님과 모든 등반가들의 부모님, 먼저 가신 악우들을 위해 개척하다.’

몸통만한 홀링백을 메고 버스를 갈아타며 거지처럼 바위를 찾아다닌 천둥벌거숭이의 날들을 두고 누가 산에 미친놈이라 부른다 한들 한 마디 항변할 말이 있으랴. 그는 묵묵히 몸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써내려갔다.

김점숙과 토왕성폭 랑데부 단독등반을 마치고 좌골로 하산하는 길, 작은 오버행을 클라이밍 다운해 내려오며 키가 작아 힘들어하는 점숙에게 승철은 어깨를 내밀었다. 1995년 둘은 도봉산 아래 어택캠프에서 백년가약을 맺고 의정부에 샤모니라는 이름의 실내암장을 세운다.

“평소에 그렇게 말도 없고 정도 없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아이젠 신은 발로 그냥 밟으라고…. 그는 돈도 다 필요 없고 둘 다 산 좋아하니까 즐겁게 살자고 말했지만, 늘 생활에 대해 고민하고 스스로 가장으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한다고 미안해했어요. 다른 어떤 일보다도 더 잘할 수 있는 게 산에 가는 일이라고, 5개년 계획은 그래서 나온 것 같아요.”

“등반할 때 보였던 모습들이 꼭 그의 성격인 것 같아요. 안 되는 곳이라도 꼭 몇 번을 떨어지더라도 포기하고 내려온 것을 본 적이 없어요. 어떻게든 그 길만 보고 온 몸으로 비비더라도 올라가려고만 했으니까.”

5개년 계획. 1998년 탈레이 사가르 북벽과 드류 서벽 연장등반, 1999년 칠레 세로토레와 네팔 랑탕리룽 동벽, 2000년 북미 알래스카 헌터 북벽과 캐나다 배핀 아일랜드, 2001 러시아 악수와 마셔브룸 동벽, 2002년 마칼루 서벽.

군을 제대한 김형진과 다시 만난 최승철은 파키스탄 그레이트 트랑고타워에 ‘코리아 판타지’라는 변형루트를 개척하며 등정에 성공하고, 그해 가을 ‘익스트림 라이더’라는 이름의 등산학교를 연다. 객관적으로 보건대 적어도 그것이 그들의 생계를 해결해 주리라고는 당시에 기대하기 힘들었으며, 그들의 5개년 계획과 어떤 연관성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그 전까지 선인봉 아래서 만나면 담배 한 가치를 나누어 피우는 사이 정도였던 승철과 가까이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계기가 된 것은 그 때문이었다. 밤늦은 시간 설악산 갱기폭을 내려오며 그는 반쯤 찌그러진 코퍼헤드 하나를 내게 건넸었다.

“써.”

선인봉에는 유독 70년생 개띠들이 많았다. 서로 산악회는 달랐지만 늘 어울려 다니던 그들은 스스로를 ‘개띠클럽’이라고 부르곤 했다. 승철이 원정을 준비하고 있을 때 종로5가 우리곱창에서 만났던 개띠들은 더 이상 그의 질주를 막고 싶어 했다. 친구들이 설득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 가족이 있는데 이제 철들만한 나이가 된 것 아니냐하는 의견들이 오래도록 쪽탁자를 사이에 두고 계속됐다. 승철은 한 모금도 술을 마시지 않았다. “다녀올게.” 그 뿐이었다. 그리고 그는 첫 번째 목표인 탈레이 사가르로 떠났다.

승철의 주머니에는 단지 100달러가 들어있었고, 그건 사고 이후 발견된 그의 유품 속에 그대로 있었다. 그는 일기를 쓰지 않았지만 탈레이 사가르로 떠나며 그 전까지 자신의 등반기록을 꼼꼼히 정리해두었다.

세 사람의 장례식 때 사용했던 낡은 방명록의 마지막 장을 들추다 눈에 띄는 한 구절을 발견했다.

‘시대를 앞서 가는 등로주의의 표상이었던 그대들….’

1998년 9월 28일의 기억

산을 올라 거기에 새로운 선을 하나 긋는 일이 예술과도 같다면, 산쟁이는 누구보다도 전위적인 예술가다. 때로 목숨을 걸기도 하니까. 그가 산쟁이건 시인이건 이런 부류의 이들에게는 뛰어넘을 수 없는 신화가 있다. 바람처럼 빨리 살고 아직 젊을 때 죽어 아름다운 시체를 남긴다는 것….

자신의 죽음으로 불멸의 무언가를 완성하고 싶다는 유혹은 누구에게나 존재하지만 세상은 모든 이들이 그런 아름다운 기회를 갖게 내버려두지 않는다. 그래서 청춘의 광기로 살아가다 스물 여덟의 나이에 영원히 미완으로 남은 청년 최승철, 세상이 늙고 타협하는 이 시간에도 영원히 시대와 불화하며 보다 어렵고 보다 가파른 왼쪽 길로 고개를 돌리던 그 짧은 여행의 기록이 그리울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