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18-12-05 22:46 (수)
우리는 언제부터 이 매듭을 사용했을까
우리는 언제부터 이 매듭을 사용했을까
  • 이영준 기자
  • 승인 2018.01.19 23:2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프루지크 매듭과 마하드 매듭 이야기
고정된 로프를 따라 오르는데 사용되는 프루지크 매듭. 사진 istock
고정된 로프를 따라 오르는데 사용되는 프루지크 매듭. 사진 istock

 

1869년 창립한 독일산악회(DAV)는 독일 전역에 355개 지부, 105만 명의 회원이 활동하고 있는 세계 최대의 산악회다. 두 번째로 큰 산악회는 1862년 창립해 회원 32만 명인 오스트리아 산악회(OeAV). 
두 산악회는 오랜 역사만큼 유럽의 현대사와 맞물려 다양한 굴곡을 겪어왔는데, 그중 하나가 나치(Nazi)를 거치며 일어난 정치적 격변이다. 
독일과 오스트리아는 1873년 동맹을 맺으며 두 산악회 또한 이름을 독일-오스트리아산악회(DOAV)로 바꾸고 함께 활동했다. 그런데 제1차 세계대전과 함께 반유대주의가 확산되며 1924년 두 산악회에서 유대인 회원들을 제명하고 산악회가 운영하는 주요 산장들에서 유대인 출입금지 정책을 펴기도 했다.
1938년 오스트리아가 독일에 완전히 합병되며 산악회 또한 통합해 다시 독일산악회(DAV)가 되는데, 1942년까지 이 기간을 그들은 특별히 

‘나치독일산악회(Nazi German Alpine Club)’로 부른다.

 

이 사람이 칼 프루지크 박사. 비엔나 태생인 칼 프루지크는 청년시절 음악을 전공했다. 곱상한 얼굴과는 달리 알프스에서 70여 개의 코스를 개척한 유능한 산악인이었다.
이 사람이 칼 프루지크 박사. 비엔나 태생인 칼 프루지크는 청년시절 음악을 전공했다. 곱상한 얼굴과는 달리 알프스에서 70여 개의 코스를 개척한 유능한 산악인이었다.

 

나치독일산악회는 독일-오스트리아 합병의 일등공신이자 당시 오스트리아 수상이었던 잉크바르트가 회장을 맡으며 히틀러의 강력한 후원을 등에 업고 오스트리아 체육부 산하단체로 활동하게 됐다. 우리로 치면 일제 때 이완용쯤 되는 사람이 산악회장이 되었으니 오죽했겠나. 나치독일산악회는 우리가 알고 있는 하인히리 하러 일행의 아이거 북벽 초등과 낭가파르바트 등반 등으로 승승장구를 하게 된다.

나치독일산악회에서 잉크바르트 회장의 오른팔이었던 사람은 칼 프루지크 박사였다. 이미 1차대전에 참전하기도 했던 그는 나치당원으로 활동하며 1941년 45세의 나이에 독일군 대위로 참전해 2급훈장을 받기도 했지만 연합군에 포로로 잡혀 1947년까지 복역해야했다. 그런데 산악계에서 평판은 나쁘지 않았는지 포로에서 풀려나자마자 독립된 오스트리아산악회의 초대 부회장을 맡고 이후 회장을 두 차례 연임했다.

하지만 프루지크는 이념과 정치를 떠나 재능 있는 산악인이었다.

체코계 오스트리아인으로 10대 때부터 알프스 등반을 하며 70여개 루트를 초등하기도 한 그는 자신의 이름을 딴 프루지크 매듭을 고안해 1931년 오스트리아산악회에서 발간한 등반기술교재에 발표하기도 했다. 
프루지크 매듭은 기존 거스히치와 거스히치를 응용한 카우히치(소를 묶어두는 매듭으로 끊어진 로프를 잇는 용도로도 사용)라는 매듭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만들었다고 하는데 재미있는 뒷이야기가 있다. 
프루지크가 1차 대전 참전 당시 어느 겨울밤 전우들과 기타를 치던 중 기타줄이 끊어졌는데 그가 즉석에서 고쳐보겠다고 하고 동료들 앞에서 카우히치를 한 바퀴 더 돌려 매듭을 만들어 기타줄을 이어 다시 연주를 할 수 있게 했다고 한다. 프루지크 매듭은 이미 19세기에 뱃사람들이 사용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공식적으로 발표한 건 1931년이 처음이다. 여튼 프루지크 매듭은 이후 오랫동안 대표적인 마찰매듭으로 산악조난사의 여러 현장에 등장했다. 
오스트리아산악회는 1991년 프루지크매듭 60주년을 맞아 회보 12월호에 특집기사를 싣기도 했다. 
그런데 이런 프루지크 매듭의 아성에 도전한 사람이 있었다. 바로 프랑스의 젊은 클라이머 앙드레 세르지 마하드라는 사람이다. 

자신이 고안한 매듭을 시범 보이는 청년 마하드. 한동안 클램하이스트 매듭이라 불리던 이 방법은 최근 마하드 매듭으로 고쳐 부르기 시작했다.
자신이 고안한 매듭을 시범 보이는 청년 마하드. 한동안 클램하이스트 매듭이라 불리던 이 방법은 최근 마하드 매듭으로 고쳐 부르기 시작했다.

그가 발명한 매듭은 프랑스에서는 최근부터 ‘마하드 매듭’으로 불리는데 마하드가 요절한 탓인지 지금까지 영어 오토블럭이나 독일어 클램하이스트 매듭으로 더 많이 알려져 왔다.
프랑스산악회 마르세이유 지부 회원으로 활동하던 그가 새로운 매듭법을 발표한 때는 1961년, 1945년생인 마하드가 16살 때였다. 
마하드는 기존 프루지크 매듭이 만들기 번거롭고 풀기도 번거로운 단점을 고민하다가 떠오른 아이디어대로 등반을 해보곤 그림을 그려 자신의 등반 파트너였던 앙드레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는 자신이 고안한 매듭과 줄사다리를 이용해 다양한 등강법을 시험하고 기록으로 남겼으며, 하강 중 백업장치로도 사용했다. 

마하드가 고안해 친구 앙드레에게 보낸 편지.
마하드가 고안해 친구 앙드레에게 보낸 편지.

하지만 마하드는 그의 나이 18세 때인 1963년 7월 16일, 15살된 동네 후배 장 마리 로시에르와 함께 등반을 하러 간다고 집을 나섰다가 드로이테 산군의 암벽 하단에서 목이 부러진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당시엔 마하드 매듭이 기존 프루지크 매듭보다 마찰력이 약해서 사고가 났다는 등 여러 이야기들이 있었다고 한다.
마하드의 이야기가 다시 조명된 건 2000년대 들어 프랑스산악회와 프랑스국립스키등산학교(ENSA)에서 매듭에 대한 연구를 하면서부터이다. 

사람은 가고 매듭은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