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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팔인의 죽음은 ‘희생’이 아니다
네팔인의 죽음은 ‘희생’이 아니다
  • 오영훈 미국통신원
  • 승인 2018.10.28 1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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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르자히말에서 사망한 4명의 현지고용인을 기리며

책임을 은근슬쩍 모면해보려는 수작이 아니다. 히말라야 등반에서 현지고용인들이 당하는 사고를 ‘희생’이라 부르지 말자는 얘기다. 추모의 글을 겸해 그들을 떠올려보려 한다.

치링, 상부, 푸르부, 나뜨라
최근 구르자히말에서 사고를 당한 네 명의 현지인들은 누군가. 세 명은 키친 스태프고 한 명은 포터였다. 키친 스태프 세 명은 쿡인 치링 보떼(Chhiring Bhote, 31세)와 키친헬퍼(속칭 ‘키친보이’)였던 락빠 상부 보떼(Lakpa Sangbu Bhote, 23세), 푸르부 보떼(Purbu Bhote, 22세)다. 현지 포터는 나뜨라 바하두르 챈텔(Natra Bahadur Chantel, 연령 미상)이다. 이 중 치링은 십여 년 동안 수많은 한국 원정대와 트레킹에 동행해 한식조리는 물론 한국어와 각종 관행에도 능통하다. 김창호 대장이 대부분 참여했던 ‘다이내믹 부산 희망원정대’(2006년~2011년)의 8천 미터 14좌 등반 및 이어진 김 대장의 원정들에 전담해 참여했다. 김 대장이 가장 신뢰했던 네팔인이다. 치링은 두 아이의 아빠로, 티베트 문화권 이주자들이 모여든 카트만두 보더나트 근처에 살고 있었다.

치링 보떼. 2013년 9월 네팔 쿰부 히말라야 암푸1봉 베이스캠프.
치링 보떼. 2013년 9월 네팔 쿰부 히말라야 암푸1봉 베이스캠프.

상부와 푸르부는 치링과 사촌 간이다. 어릴 적 부모를 잃고 이모 집에서 자란 치링에게 이모의 외아들 상부는 친동생이나 다름없었다. 상부는 원정대 동행 경험은 거의 없다. 치링의 시골집은 네팔 북동부 산쿠와사바 지역의 북쪽 끄트머리 홍구옹 마을에 있는데, 치링과 오랜 인연을 맺은 필자는 이곳까지 물어물어 찾아가 연로한 이모님 댁에서 며칠 묵기도 했고, 당시 고등학생으로 방학을 맞은 상부와 함께 일대를 여행한 경험이 있다. 졸지에 두 아들을 잃은 (이모) 모친에게는 시집간 딸이 하나 있긴 하다.

락빠 상부 보떼(좌)와 필자. 2013년 12월 네팔 산쿠와사바주 골라(Gola).
락빠 상부 보떼(좌)와 필자. 2013년 12월 네팔 산쿠와사바주 골라(Gola).

 

반면 푸르부는 치링과는 조금 먼 사촌 간으로 키친헬퍼 경험이 꽤 된다. 2013년 가을 필자가 참여했었던 암푸1봉(6870m) 원정에 치링과 동행했다. 몸집이 작고 조용한 편인데 정직한 성격에 불만을 잘 품지 않으며 매사에 부지런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푸르부 보테. 2013년 10월 네팔 쿰부 암푸1봉 베이스캠프.
푸르부 보테. 2013년 10월 네팔 쿰부 암푸1봉 베이스캠프.

 

원래 서류상으로는 상부와 푸르부가 아닌 다른 키친헬퍼 두 명이 이번 원정대를 동행하는 것으로 되어있었다. 치링의 결정 변경인지 아니면 해당 대행사의 실수 또는 고의 누락인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어쨌든 상부와 푸르부는 사망으로 인한 정부보험 보상금을 받지 못하게 됐다.

상부의 모친이자 치링의 친모와도 같았던 이모. 2013년 11월 네팔 산쿠와사바주 홍구옹.
상부의 모친이자 치링의 친모와도 같았던 이모. 2013년 11월 네팔 산쿠와사바주 홍구옹.

 

나뜨라 바하두르 챈텔은 원정대를 격려차 방문했다가 변을 당한 정준모 산악인의 짐꾼으로 동행했다. 즉 도로가 끝나는 마지막 마을인 다르방(1070m)에서 즉석으로 고용되었으리라 추정한다. 즉 카트만두 대행사를 통해 고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나뜨라도 사망 보험 절차를 받지 못하게 됐다. 이들 셋에 대한 금전적 보상 및 예우는 곧 한국에서 방문할 조사/사후처리팀이 합당한 선에서 해결할 방침이다.

치링과 상부, 푸르부의 시골 마을 홍구옹. 네팔 산쿠와사바주 북부.
치링과 상부, 푸르부의 시골 마을 홍구옹. 네팔 산쿠와사바주 북부.

 

김 대장의 사전조사에 따르면 구르자히말의 아랫마을인 구르자카니(2620m)에는 백여 명의 인구가 하나의 종족을 이루고 사는데, 그들만의 언어를 사용하고 문화관습도 인근 마을과 꽤 달라 상당히 독특하다고 한다. 안내인 역할도 맡았을 나뜨라 챈텔은 아마도 이 마을 출신이었을 것이다. 한편 네팔의 120여개 종족 중에는 ‘챈텔’족도 있다. 이들은 총인구 11,810명으로 79번째 소수민족이다. 네팔에서 소수민족의 경우 종족명을 성으로 갈음하는 경우가 일반적이기 때문에 나뜨라 챈텔을 챈텔족이라 봐도 무방할 것이다. 챈텔족은 대부분이 구르자히말, 구르자카니, 도로에 접한 다르방 등이 포함된 멕디(Myagdi)주와 인근의 교통요지 바글룽(Baglung)주에 나눠 살고 있다. 그렇다고는 해도 챈텔족은 멕디주에서도 소수민족에 속한다. 나뜨라의 사고사는 챈텔족에게는 꽤 드문 경우라 할 수 있겠다.

고용인의 죽음과 보상 처리
히말라야 원정대에서 현지 고용인들이 사망하는 경우는 잦다. 셰르파들이 대표적이다. 1922년 조지 말로리 등 영국인들이 조직한 최초의 에베레스트 원정대에서 눈사태로 인해 셰르파 7명이 사망한 것은 고산등반을 돕던 현지인이 사망한 히말라야 참사의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로 꼽힌다. 1934년 낭가파르바트에서 독일팀 대원들을 돕다가 사망한 6명의 셰르파들은 ‘주인을 돕기 위해 죽기까지 충성하는 셰르파’로 서구 낭만주의자들의 눈에 영웅적인 모습으로 그려지기도 했다.

고산등반만이 아니라 트레킹 중에도 사고를 당하기도 한다. 1995년 11월, 에베레스트 지역 고쿄 마을 인근의 롯지가 눈사태에 파묻혀 일본인 관광객 13명과 네팔 현지인 13명 등 총 26명이 몰사하기도 했다. 네팔에서 한 번의 눈사태로 가장 많은 인원이 사망한 사례로 꼽힌다.

사망한 현지인에 대한 보상은 오늘날 의무적으로 가입하게 되어있는 네팔 정부보험으로 일차 충당한다. 이에 더하여 남은 가족들에 대한 처우는 대개 사고자를 간접 고용한 셈인 외국인 등반팀, 사고자를 원정대에 배정한 일차고용인 현지 대행사, 또 사고자가 소속된 동족 공동체 의회 등에서 협의하여 진행된다. 지난 2015년 에베레스트 아이스폴 지대에서 있었던 셰르파 16명이 눈사태에 매몰된 사건 이후 현지고용인의 처우에 대한 여론이 급격히 나빠지면서, 네팔 정부는 보험배상금을 등반자(셰르파 가이드)는 미화 만5천 달러, 베이스캠프 스태프는 만 달러 등으로 두 배가량 대폭 인상하기도 했다.

현지고용인의 죽음을 ‘희생’으로 보는 시각의 문제점 아홉 가지
돈 얘기를 이렇게 늘어놓은 까닭은 ‘돈이면 된다’는 태도가 참으로 어처구니없다는 것을 이제부터 보여주고자 함이다. 이는 고용인이 산에서 사망하는 경우를 두고 ‘죄 없는 현지인은 왜 죽어야 하나’는 흔한 생각에서 시작된다. 산악인들은 물론, 기자, 평론가, 작가, 학자, 일반인들 모두 그런 태도에 쉽게 공감한다. 자신의 이름 드높이려, 혹은 고상한 ‘자아성찰’이나 하려고 남의 나라 성스러운 산에 가서 ‘위험한 장난’ 하는 것도 기가 찰 일인데, 가난한 현지인을 돈이라는 미끼로 끌어들여 희생시키기까지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시각은 ‘돈으로 키운 불 돈으로 끈다’는 발상으로 귀결된다. 이렇게 현지인의 죽음을 희생으로 보는 ‘희생주의’적 시각에는 다음 아홉 가지 점에서 문제가 심각하다.

첫째, ‘희생주의’적 시각은 현지인들이 선택과 판단의 주체임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들 개개인의 선택의 권리, 위험에 대한 판단력을 먼저 존중해야 한다. 저들 중 누구도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마음’으로 산에 온 게 아니다. 밖에서 보는 시선들과 마찬가지로, 당사자들 역시 주어진 환경 속에서 끊임없이 선택과 판단을 계속해 나가는 오롯한 행위 주체다. 아무리 처음부터 불평등한 국제관광의 상황이라도 개인으로서의 주체성을 인정하는 것이 첫걸음이 되어야 한다.

둘째, 오늘날의 히말라야 등반이 있기까지 현지인들이 쏟았던 노력과 공로도 인정하지 않는다. 많은 이들이 히말라야 등반이란 서양인들이 여전히 주도하는 스포츠로 인식한다. 심각한 오류다. ‘셰르파’라는 등반사에 유례없는 직종을 창안하고 이윤을 창출하며 독점해 온 주체성을 간과하면 히말라야 등반의 반쪽만을 보는 것이다. 오늘날 현지 가이드를 고용하지 않고는 히말라야 등반은 불법일 뿐만 아니라 엄두조차 내기 어렵다. 올라갈 수 있게 허용된 미등봉 조차도 네팔 당국에 의해 이미 목록이 지정돼 있다. 이름 없는 어느 미등봉을 ‘개방’하는 것은 셰르파들의 물밑작업으로나 가능하다. 19세기 말 마틴 콘웨이, 찰스 브루스, 알프레드 머메리 등 히말라야 원정등반 선구자들이 초석을 놓았던 등반 양식 중 9할은 오늘날 대행사와 셰르파에 의해 이루어진다. 가이드 고용 유무를 떠나 외국인들이 고산에서 ‘자유’를 만끽한다고 느끼는 현장은 이미 현지인들의 숱한 보조와 용역에 의해 ‘만들어진 상품’일 뿐이다. 셰르파들이 자신들을 히말라야의 주역이라고 믿는 게 하등 이상할 바 없다.

일렬로 늘어선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의 대원 텐트. 현지대행사에서 외국인 대원들에게 정형화된 패턴으로 서비스가 제공된다. 2013년 5월.
일렬로 늘어선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의 대원 텐트. 현지대행사에서 외국인 대원들에게 정형화된 패턴으로 서비스가 제공된다. 2013년 5월.

 

셋째, 현지인이 외국인에게 서비스를 제공하며 얻는 자아실현의 측면도 간과한다. 내가 만난 셰르파들 대부분은 외국인의 꿈 실현을 도와주는 것에서 자부심을 얻는다고 했다. 짐을 나르고 로프를 설치하고 텐트를 세우고 얼음을 녹여 차를 끓여주는 것은 그들에겐 자신의 집에 찾아온 손님을 정성스레 접대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또 이런 외국인을 도와 험한 산꼭대기에 오르는 것을 남자다운 용기, 체력, 책임감의 표현으로 내세우기도 한다.

등반가이드 셰르파가 인도 여성 등반가가 에베레스트의 아이스폴 사다리를 지나는 것을 돕고 있다. 2013년 5월.
등반가이드 셰르파가 인도 여성 등반가가 에베레스트의 아이스폴 사다리를 지나는 것을 돕고 있다. 2013년 5월.

 

넷째, 산을 앞장서 오르며 얻는 ‘등반의 재미’를 무시한다. 이들에게 이상적인 등반이란 서양인의 소규모 알파인스타일도 아니요 한국인의 ‘모두가 대장’ 등반도 아니다. 셰르파의 등반은 정말 힘들고 고되다. 대신 그들은 등반 중 사진을 많이 찍는다. 어렵고 험한 장면일수록 남겨 나중에 서로에게 보여주고 자랑하는 게 저희 사이의 쏠쏠한 재미다. 또한 이들의 원정등반은 전 과정이 수많은 사람들의 협업으로 이루어져 있다. 남아시아에는 매사에 여러 명이 달려들어 평등한 대화를 서로 주고받으며 의사결정을 이어나가는 문화가 널리 퍼져 있다. 원정등반도 그들에겐 어려운 과제를 함께 풀어나가는 모험적이면서 재미있는 문제풀이처럼 느껴진다.

다섯째, 현지인들은 ‘돈’만 바라는 나머지 종노릇까지도 감수하는 존재로 그려진다. 즉 ‘희생주의’로 혀를 끌끌 차며 히말라야를 보는 이들에겐 네팔인을 돕는 길이란 원조, 개발, 교육 등을 통해 궁극적으로 ‘돈’을 많이 벌게 하는 것 정도일 뿐이다. 또 네팔인과 거래를 하는 따위의 상황에서 만일 상대가 애매한 태도를 취한다 치자. 많은 한국인들이 이런 경우 ‘이 친구 내게서 돈을 더 뜯어내려고 이러나, 어림도 없지!’하고 생각해버리곤 한다. ‘네팔 초보자’만 이러는 게 아니다. 히말라야 경험이 풍부하고 현지인들과 지속적인 관계를 맺은 여러 한국인 등반가들에게서도 이런 모습을 자주 봤다. 물론 돈이 중요하지 않은 네팔 현지인은 없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말해 이들은 우정, 진실, 봉사 이런 것들에 적어도 한국인들보다는 더 비중을 두고 관계를 만들어 간다고 필자는 느낀다. 2013년 봄 에베레스트에서 서성호 대원이 사망했을 때, 치링은 당시 원정대의 2캠프(6450m) 쿡이었다. 시신 수습을 위해 조직된 구조대에 참가해 사우스콜 4캠프(7950m)까지 올라왔다. 그때 눈물을 흘리던 치링의 얼굴이 아직도 선명하다.

여섯째, 현지인들을 하나로 뭉뚱그려 보고 내부의 다양한 관계를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현지 고용인 사이에는 상당히 편파적인 직업상 위계가 존재한다. 위부터 아래로 직책을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현지대행사 사장 → 관리인 → 팀 리더 → 베이스캠프 매니저 → 셰르파 리더 → 등반 가이드(‘셰르파’) → 보조 셰르파 → 쿡 → 키친 헬퍼 → 현지 포터 및 야크 몰이꾼 등이다. 이 모든 단계에서 연쇄적 임금 착취와 ‘떼어먹기’가 발생한다. 인보이스 등으로 외국인이 알게 되는 명목상 임금과, 실제 고용인이 손에 쥐는 실임금 사이에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한 여러 단계의 전달관계가 존재하고, 따라서 최종 금액은 연체, 환차, 분실 등으로 턱도 없이 줄어들게 마련이다. ‘아랫사람’들에겐 그러나 나름대로 전략이 있다. ‘윗사람’에게 알리지 않는 자기만의 인맥과 다른 벌이를 만들어 별도 옵션과 대안의 기회를 항상 열어 놓는다. 치링의 예를 계속 들면 에베레스트의 시신 수습 당시 셰르파 리더가 치링 몫의 임금을 거의 절반이나 떼어먹었다며 가까웠던 필자에게 고자질하기도 했다. 이러한 불법·비리·사기의 관행은 네팔 사회 전반에 퍼져 있다. 이쪽에서 당했던 이가 저쪽에선 떼어먹는다. 그렇다고 ‘믿을 사람 하나 없다’며 혀를 차고 돌아서는 것처럼 순진하고 편협한 생각도 없다. 믿을 수 있는 경우와 믿는 척해야 할 경우를 분간할 줄 알면 된다.

에베레스트 2캠프(6450m)에서 대행사의 2캠프 매니저가 셰르파들이 수송하는 산소통의 개수를 적고 있다. 현지고용인 사이의 복잡한 위계 관계는 외국인 등반가들에게는 잘 보이지 않는다. 2013년 5월.
에베레스트 2캠프(6450m)에서 대행사의 2캠프 매니저가 셰르파들이 수송하는 산소통의 개수를 적고 있다. 현지고용인 사이의 복잡한 위계 관계는 외국인 등반가들에게는 잘 보이지 않는다. 2013년 5월.

 

일곱째, 셰르파족과 비셰르파 네팔인의 구분을 간과한다. 위 현지인 위계구조에서, 쿡으로 내려오기 전까지는 셰르파족이 거의 독점하다시피 해 왔다. 적은 노동으로 더 많은 돈을 번다. 치링도 등반 가이드를 하고 싶었지만 보떼인 그에게 기회가 돌아가진 않았다. 새벽마다 일어나 얼음을 녹여 밥 짓고 설거지하는 것은 캠프를 돌며 짐을 나르고 저녁엔 푹 쉬는 일에 비하면 그다지 즐거울 건 없다. 네팔엔 티베트 고산족이 수백만 명이다. 극히 소수에 지나지 않는 셰르파, 특히 일부 마을 출신자들이 이런 고임금 직종을 독점하고 있다.

에베레스트 2캠프(6450m)의 주방텐트에서 일하는 쿡(치링, 좌)과 키친헬퍼. 보떼족인 둘에겐 더 보수가 높고 일이 ‘재미’가 있는 등반가이드 자리를 잡기가 어렵다. 2013년 5월.
에베레스트 2캠프(6450m)의 주방텐트에서 일하는 쿡(치링, 좌)과 키친헬퍼. 보떼족인 둘에겐 더 보수가 높고 일이 ‘재미’가 있는 등반가이드 자리를 잡기가 어렵다. 2013년 5월.

 

여덟째, 불균등한 관심을 유발한다. 히말라야 등반에서 현지고용인 사망사고는 매년 발생하지만 손에 꼽을 정도다. 반면 네팔에서 몬순 철이면 홍수와 산사태로 목숨을 잃는 저지대 주민들의 수가 매년 수백 명에 이른다는 것은 외부에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왜 외국인이 세운 학교, 병원은 높은 산들이 위치한 일부 지역에만 집중되는가. 왜 지구온난화로 인한 피해 연구는 인구밀도가 낮은 산악지역에 집중되는가. 쓰레기, 환경 오염 문제는 왜, 여성 인권 신장 문제는 왜, 포터의 권익 신장 문제는 왜 모두 주요 관광지에만 몰려서 논의되는가. 네팔의 고지대/저지대 주민들 사이의 불평등한 관계는 18세기 네팔 중서부 고르카족이 카트만두 계곡을 통일해 최초 왕조를 수립하면서부터 이어져 내려왔다. 저지대 주민들은 네팔 전역에 한창인 도로 건설 공사조차 산악지역 주민의 이동만을 고려한 설계라고 비판하지만 듣는 이가 없다. 이젠 히말라야 등반이라는 유명세를 타고 티베트 불교도 셰르파에게 관심의 특혜가 돌아가니, 수많은 사람들이 상대적 박탈감에 도시로의 이주, 외국인에게 잘보이기, 불교도로 전향, 셰르파 행세 따위를 해오는 것이다.

아홉째, 전지구적인 구조적 폭력을 방치한다. 히말라야 등반 중 사망하는 현지인이 ‘희생자’라면, 기후변화, 행정공백으로 인한 홍수와 산사태로 인한 인명, 재산피해는 무어라고 불러야 하는가. 네팔 밖으로 눈을 돌려, 식민과 수탈, 내정간섭으로 암덩이처럼 키워진 독재정부 아래 고통받는 베네수엘라와 소말리아 주민들의 고통은 무어라 불러야 하는가. 십자군 전쟁으로부터 내려오는 이슬람 혐오가 빚은 시리아 내전에서 무참히 죽어간 수십만의 무고한 시민들의 영혼은 누가 애달파하는가. 현지고용인의 죽음을 ‘희생’이라고 부를 때 우리 시야를 피해 지나치는 것들은 너무도 많다.

이 또한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죽음’이다
가까웠던 이가 세상을 떠나고 없다는 사실은 ‘감’이 잘 잡히지 않는 얘기다. 상실감 바로 그것이 남겨진 이들에게 고통의 근원이 된다. 죽음 자체가 아니라 죽음이 타자라는 사실이 절망이 된다. 절망을 삭여내는 일이 산 자가 맞닥뜨린 절체절명의 과제다. 그렇게 산 자는 죽음을 겪는다. 죽음을 겪는 곳에서 알짜배기 윤리가 솟아 나온다. 참과 거짓의 맨얼굴을 보고 싶으면 죽음을 들여다보라.

현지인의 죽음이라고 뭐가 다를까. 산악인의 나르시시즘은 응당 욕을 먹어야 할 테지만 현지인을 볼모로 잡지는 마라. ‘희생’이란 말로 퉁치는 것은 죽은 자가 열어제낀 땅속에서부터 솟아오는 그 참의 위대함에 침을 뱉는 모욕이다.

돈보다 마음이랬다. 마음은 말로 물건으로 표현해버릴 수 없는 것을 담아두는 그릇이다. 치링, 상부, 푸르부, 나뜨라, 히말라야에서 잠든 그 땅의 모든 아들딸들에게 우리 마음을 열어두자. 먼저 간 우리의 산친구들이 우리 마음속에 들어와 살듯이, 그들도 우리 마음 어딘가에 이미 자리를 잡고 살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