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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인수봉이 남긴 교훈
[칼럼]인수봉이 남긴 교훈
  • 이용대 코오롱등산학교 명예교장
  • 승인 2018.11.24 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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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수봉(仁壽峰)’은 그 이름처럼 ‘어질게(仁), 목숨(壽)을’ 보호해주어야 하는 봉인데 이름과는 반대로 사망자를 가장 많이 낸 오명(汚名)의 역사를 안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47년 전인 1971년 11월 28일.

급작스런 기상변화로 강풍과 한파에 노출된 7명이 인수봉 서면에서 동사했다. 이날의 사고는 산에서 기상 돌변이 가져다주는 자연재앙의 결과가 어떤 것인지를 알게 해준 교훈을 남겼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젊은이들이 도전의지를 불태우던 장소였으나 어느 한 순간에 아비지옥으로 변했다.

인수봉 조난사상 한꺼번에 가장 많은 사상자를 기록한 하강지점에서의 대참사는 엄청난 충격파였다. 28일 밤 등반을 끝내고 하강 중이던 7명의 산악인들은 세찬 바람에 로프가 엉켜 지상으로 내려오지 못한 채 오버행 아래 테라스에 고립된다. 이들은 시속 30km로 불어오는 세찬 강풍과 기상급강하로 체감온도가 영하 33도까지 떨어지는 최악의 상황에 놓인다. 뼛속까지 파고드는 한파와 굶주림 한치 앞도 예측할 수 없는 공포 속에서 몸을 웅크린 채 저체온증과 사투를 벌이다가 밤이 깊어지면서 하나 둘씩 목숨을 잃고 쓰러졌다.

1971년 11월 29일, 전날 인수봉 하강지점에서 조난당한 사망자들을 구조대가 수습하고 있다. 사진제공 이용대
1971년 11월 29일, 전날 인수봉 하강지점에서 조난당한 사망자들을 구조대가 수습하고 있다. 사진제공 이용대

 

동료의 죽음을 지킨 사람

그날 밤 인수봉 사고현장에서 자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은 채 조난한 동료를 끝까지 돌본 사람의 휴먼드라마가 떠오른다.

한국 산악조난사상 많은 사상자를 기록한 인수봉 하강지점에서의 대참사는 사회적인 충격파가 컸다. 그날 밤 10시 인수봉을 하강 중이던 정윤섭과 7명의 산악인들은 세찬 바람으로 로프가 엉켜 지상으로 내려오지 못한 채 오버행 아래 테라스에 고립된다.

이들은 시속 30km로 불어오는 세찬 강풍과 기상급변으로 체감온도가 영하 33도까지 떨어지는 최악의 상황에 놓여있었다. 뼛속까지 파고드는 한파와 굶주림, 한치 앞도 예측할 수 없는 공포 속에서 동사직전의 몸을 웅크린 채 저체온증과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밤이 깊어가면서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 앞에 이들은 무기력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들은 하나 둘씩 목숨을 잃고 쓰러졌다. 정윤섭은 본인의 품에 안겨 의식을 잃어가던 구자광에게 자기 옷을 벗어 입혀주고 체온이 떨어지는 그를 격려하며 돌보고 있었다. 이때 구조대가 올라와 정윤섭에게 탈출을 권했으나 죽어가는 동료를 버려둔 채 자기만 탈출할 수 없다고 완강하게 거절했다. 그후 구자광의 최후를 확인한 정윤섭은 7시간동안 고립되었던 지옥의 테라스에서 구조대의 도움으로 생환한다.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자신의 안위를 버려둔 채 쓰러져가는 동료를 지킨 정윤섭의 헌신적인 행동은 오래도록 미담으로 전해오고 있다. 이런 일은 자기희생을 치를만한 윤리적인 소신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등산의 자랑스러운 전통은 자신의 위험을 돌보지 않은 채 동료를 끝까지 챙기는 것이다. 자일을 함께 묶는 자일샤프트(Seilschaft)는 위험을 함께 나누는 공동운명체라는 정신적인 유대감에서 비롯된 전통이다. 자일의 사용은 육체나 정신을 하나로 묶는 행위다.

애타심(愛他心), 헌신(獻身)과 봉사(奉仕), 희생, 의무감 등이 사라져버린 상실의 시대를 살아가는 지금 남을 위해 자신을 버리는 숭고한 정신은 신선한 충격이자 가슴 울컥한 감동일 수밖에 없다.

애타심과 헌신 같은 말들은 팍팍한 삶을 살아가면서 빛바랜지 오래된 낱말이지만 재난 현장에서 자신의 안위를 버려둔 채 타인을 보살피는 일이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은 미덕(美德)의 세계가 아직도 남아있음을 의미한다. 곤경에 처한 사람을 보살피기 위해 위험 속에 머무는 일은 윤리적 소신과 용기 없이는 실천하기가 어려운 일이다. 이런 사람이 많을수록 우리사회는 한층 더 밝아진다.

최근 성행하는 인터넷 동호회의 산행을 보면 등반당일 아침에 인사를 나누고 즉석 파트너 가 되어 함께 자일을 묶고 등반하는 광경을 볼 수 있다. 과연 그들은 자일샤프트로서의 끈끈한 애정과 신뢰가 있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 하겠다.

몇 년 전 경찰구조대장이 들려준 실화는 우리들을 놀라게 한다. 조난자 수습을 위해 현장에 출두한 그는 함께 등반한 동료들에게 사망자의 신원을 물어봤으나 이름조차 몰랐을 뿐만 아니라 “오늘은 재수가 없는 날”이라고 투덜대면서 도망치듯이 현장을 떠나버렸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