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19-08-17 19:21 (토)
70여 년전 독도에 처음 발 딛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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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영준 기자
  • 승인 2019.08.15 12:1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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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산악회 독도 조사대 1947년, 1953년 사진 공개
1947년 8월 16일부터 23일까지 진행된 조선산악회(현 한국산악회) 회원들의 울릉도-독도 탐사. 제4차 국토구명학술조사 사업으로 진행된 이 사업은 송석하 회장 외 64명이 참가했으며 울릉도의 자연과 사회에 관한 조사 및 해방 이후 첫 번째로 독도에 상륙해 우리 영토임을 알렸다. 사진 최계복(조선산악회 경북지부(현 대구지부) 초대회장)
1947년 8월 16일부터 23일까지 진행된 조선산악회(현 한국산악회) 회원들의 울릉도-독도 탐사. 제4차 국토구명학술조사 사업으로 진행된 이 사업은 송석하 회장 외 64명이 참가했으며 울릉도의 자연과 사회에 관한 조사 및 해방 이후 첫 번째로 독도에 상륙해 우리 영토임을 알렸다. 사진 최계복(조선산악회 경북지부(현 대구지부) 초대회장)
1947년 8월 16일부터 23일까지 진행된 조선산악회(현 한국산악회) 회원들의 울릉도-독도 탐사. 제4차 국토구명학술조사 사업으로 진행된 이 사업은 송석하 회장 외 64명이 참가했으며 울릉도의 자연과 사회에 관한 조사 및 해방 이후 첫 번째로 독도에 상륙해 우리 영토임을 알렸다. 사진 최계복(조선산악회 경북지부(현 대구지부) 초대회장)
1947년 8월 16일부터 23일까지 진행된 조선산악회(현 한국산악회) 회원들의 울릉도-독도 탐사. 제4차 국토구명학술조사 사업으로 진행된 이 사업은 송석하 회장 외 64명이 참가했으며 울릉도의 자연과 사회에 관한 조사 및 해방 이후 첫 번째로 독도에 상륙해 우리 영토임을 알렸다. 사진 최계복(조선산악회 경북지부(현 대구지부) 초대회장)
1947년 8월 16일부터 23일까지 진행된 조선산악회(현 한국산악회) 회원들의 울릉도-독도 탐사. 제4차 국토구명학술조사 사업으로 진행된 이 사업은 송석하 회장 외 64명이 참가했으며 울릉도의 자연과 사회에 관한 조사 및 해방 이후 첫 번째로 독도에 상륙해 우리 영토임을 알렸다. 사진 최계복(조선산악회 경북지부(현 대구지부) 초대회장)
1947년 8월 16일부터 23일까지 진행된 조선산악회(현 한국산악회) 회원들의 울릉도-독도 탐사. 제4차 국토구명학술조사 사업으로 진행된 이 사업은 송석하 회장 외 64명이 참가했으며 울릉도의 자연과 사회에 관한 조사 및 해방 이후 첫 번째로 독도에 상륙해 우리 영토임을 알렸다. 사진 최계복(조선산악회 경북지부(현 대구지부) 초대회장)
1947년 8월 16일부터 23일까지 진행된 조선산악회(현 한국산악회) 회원들의 울릉도-독도 탐사. 제4차 국토구명학술조사 사업으로 진행된 이 사업은 송석하 회장 외 64명이 참가했으며 울릉도의 자연과 사회에 관한 조사 및 해방 이후 첫 번째로 독도에 상륙해 우리 영토임을 알렸다. 사진 최계복(조선산악회 경북지부(현 대구지부) 초대회장)
1947년 8월 16일부터 23일까지 진행된 조선산악회(현 한국산악회) 회원들의 울릉도-독도 탐사. 제4차 국토구명학술조사 사업으로 진행된 이 사업은 송석하 회장 외 64명이 참가했으며 울릉도의 자연과 사회에 관한 조사 및 해방 이후 첫 번째로 독도에 상륙해 우리 영토임을 알렸다. 사진 최계복(조선산악회 경북지부(현 대구지부) 초대회장)
1947년 8월 16일부터 23일까지 진행된 조선산악회(현 한국산악회) 회원들의 울릉도-독도 탐사. 제4차 국토구명학술조사 사업으로 진행된 이 사업은 송석하 회장 외 64명이 참가했으며 울릉도의 자연과 사회에 관한 조사 및 해방 이후 첫 번째로 독도에 상륙해 우리 영토임을 알렸다. 사진 최계복(조선산악회 경북지부(현 대구지부) 초대회장)
1947년 8월 16일부터 23일까지 진행된 조선산악회(현 한국산악회) 회원들의 울릉도-독도 탐사. 제4차 국토구명학술조사 사업으로 진행된 이 사업은 송석하 회장 외 64명이 참가했으며 울릉도의 자연과 사회에 관한 조사 및 해방 이후 첫 번째로 독도에 상륙해 우리 영토임을 알렸다. 사진 최계복(조선산악회 경북지부(현 대구지부) 초대회장)
한국산악회(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함께 조선산악회에서 개명)는 1947년 첫 독도 탐사 이후 1952년 9월과 1953년 10월에도 독도를 찾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1947년 조사보고서를 바탕으로 1952년 2월 해양주권선언과 독도영유권 선언을 하게 되었다. 1953년 조사단은 홍종인 회장을 대장으로 35명이 참가했으며 최초로 독도의 서도와 동도를 암벽등반 해 측량에 성공했다. 당시 사진담당 대원으로 참가했던 김한용 선생 촬영
한국산악회(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함께 조선산악회에서 개명)는 1947년 첫 독도 탐사 이후 1952년 9월과 1953년 10월에도 독도를 찾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1947년 조사보고서를 바탕으로 1952년 2월 해양주권선언과 독도영유권 선언을 하게 되었다. 1953년 조사단은 홍종인 회장을 대장으로 35명이 참가했으며 최초로 독도의 서도와 동도를 암벽등반 해 측량에 성공했다. 당시 사진담당 대원으로 참가했던 김한용 선생 촬영
한국산악회(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함께 조선산악회에서 개명)는 1947년 첫 독도 탐사 이후 1952년 9월과 1953년 10월에도 독도를 찾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1947년 조사보고서를 바탕으로 1952년 2월 해양주권선언과 독도영유권 선언을 하게 되었다. 1953년 조사단은 홍종인 회장을 대장으로 35명이 참가했으며 최초로 독도의 서도와 동도를 암벽등반 해 측량에 성공했다. 당시 사진담당 대원으로 참가했던 김한용 선생 촬영
한국산악회(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함께 조선산악회에서 개명)는 1947년 첫 독도 탐사 이후 1952년 9월과 1953년 10월에도 독도를 찾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1947년 조사보고서를 바탕으로 1952년 2월 해양주권선언과 독도영유권 선언을 하게 되었다. 1953년 조사단은 홍종인 회장을 대장으로 35명이 참가했으며 최초로 독도의 서도와 동도를 암벽등반 해 측량에 성공했다. 당시 사진담당 대원으로 참가했던 김한용 선생 촬영
한국산악회(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함께 조선산악회에서 개명)는 1947년 첫 독도 탐사 이후 1952년 9월과 1953년 10월에도 독도를 찾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1947년 조사보고서를 바탕으로 1952년 2월 해양주권선언과 독도영유권 선언을 하게 되었다. 1953년 조사단은 홍종인 회장을 대장으로 35명이 참가했으며 최초로 독도의 서도와 동도를 암벽등반 해 측량에 성공했다. 당시 사진담당 대원으로 참가했던 김한용 선생 촬영
한국산악회(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함께 조선산악회에서 개명)는 1947년 첫 독도 탐사 이후 1952년 9월과 1953년 10월에도 독도를 찾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1947년 조사보고서를 바탕으로 1952년 2월 해양주권선언과 독도영유권 선언을 하게 되었다. 1953년 조사단은 홍종인 회장을 대장으로 35명이 참가했으며 최초로 독도의 서도와 동도를 암벽등반 해 측량에 성공했다. 당시 사진담당 대원으로 참가했던 김한용 선생 촬영
한국산악회(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함께 조선산악회에서 개명)는 1947년 첫 독도 탐사 이후 1952년 9월과 1953년 10월에도 독도를 찾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1947년 조사보고서를 바탕으로 1952년 2월 해양주권선언과 독도영유권 선언을 하게 되었다. 1953년 조사단은 홍종인 회장을 대장으로 35명이 참가했으며 최초로 독도의 서도와 동도를 암벽등반 해 측량에 성공했다. 당시 사진담당 대원으로 참가했던 김한용 선생 촬영
한국산악회(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함께 조선산악회에서 개명)는 1947년 첫 독도 탐사 이후 1952년 9월과 1953년 10월에도 독도를 찾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1947년 조사보고서를 바탕으로 1952년 2월 해양주권선언과 독도영유권 선언을 하게 되었다. 1953년 조사단은 홍종인 회장을 대장으로 35명이 참가했으며 최초로 독도의 서도와 동도를 암벽등반 해 측량에 성공했다. 당시 사진담당 대원으로 참가했던 김한용 선생 촬영
한국산악회(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함께 조선산악회에서 개명)는 1947년 첫 독도 탐사 이후 1952년 9월과 1953년 10월에도 독도를 찾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1947년 조사보고서를 바탕으로 1952년 2월 해양주권선언과 독도영유권 선언을 하게 되었다. 1953년 조사단은 홍종인 회장을 대장으로 35명이 참가했으며 최초로 독도의 서도와 동도를 암벽등반 해 측량에 성공했다. 당시 사진담당 대원으로 참가했던 김한용 선생 촬영
한국산악회(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함께 조선산악회에서 개명)는 1947년 첫 독도 탐사 이후 1952년 9월과 1953년 10월에도 독도를 찾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1947년 조사보고서를 바탕으로 1952년 2월 해양주권선언과 독도영유권 선언을 하게 되었다. 1953년 조사단은 홍종인 회장을 대장으로 35명이 참가했으며 최초로 독도의 서도와 동도를 암벽등반 해 측량에 성공했다. 당시 사진담당 대원으로 참가했던 김한용 선생 촬영
한국산악회(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함께 조선산악회에서 개명)는 1947년 첫 독도 탐사 이후 1952년 9월과 1953년 10월에도 독도를 찾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1947년 조사보고서를 바탕으로 1952년 2월 해양주권선언과 독도영유권 선언을 하게 되었다. 1953년 조사단은 홍종인 회장을 대장으로 35명이 참가했으며 최초로 독도의 서도와 동도를 암벽등반 해 측량에 성공했다. 당시 사진담당 대원으로 참가했던 김한용 선생 촬영
한국산악회(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함께 조선산악회에서 개명)는 1947년 첫 독도 탐사 이후 1952년 9월과 1953년 10월에도 독도를 찾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1947년 조사보고서를 바탕으로 1952년 2월 해양주권선언과 독도영유권 선언을 하게 되었다. 1953년 조사단은 홍종인 회장을 대장으로 35명이 참가했으며 최초로 독도의 서도와 동도를 암벽등반 해 측량에 성공했다. 당시 사진담당 대원으로 참가했던 김한용 선생 촬영
한국산악회(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함께 조선산악회에서 개명)는 1947년 첫 독도 탐사 이후 1952년 9월과 1953년 10월에도 독도를 찾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1947년 조사보고서를 바탕으로 1952년 2월 해양주권선언과 독도영유권 선언을 하게 되었다. 1953년 조사단은 홍종인 회장을 대장으로 35명이 참가했으며 최초로 독도의 서도와 동도를 암벽등반 해 측량에 성공했다. 당시 사진담당 대원으로 참가했던 김한용 선생 촬영
한국산악회(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함께 조선산악회에서 개명)는 1947년 첫 독도 탐사 이후 1952년 9월과 1953년 10월에도 독도를 찾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1947년 조사보고서를 바탕으로 1952년 2월 해양주권선언과 독도영유권 선언을 하게 되었다. 1953년 조사단은 홍종인 회장을 대장으로 35명이 참가했으며 최초로 독도의 서도와 동도를 암벽등반 해 측량에 성공했다. 당시 사진담당 대원으로 참가했던 김한용 선생 촬영
한국산악회(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함께 조선산악회에서 개명)는 1947년 첫 독도 탐사 이후 1952년 9월과 1953년 10월에도 독도를 찾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1947년 조사보고서를 바탕으로 1952년 2월 해양주권선언과 독도영유권 선언을 하게 되었다. 1953년 조사단은 홍종인 회장을 대장으로 35명이 참가했으며 최초로 독도의 서도와 동도를 암벽등반 해 측량에 성공했다. 당시 사진담당 대원으로 참가했던 김한용 선생 촬영
한국산악회(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함께 조선산악회에서 개명)는 1947년 첫 독도 탐사 이후 1952년 9월과 1953년 10월에도 독도를 찾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1947년 조사보고서를 바탕으로 1952년 2월 해양주권선언과 독도영유권 선언을 하게 되었다. 1953년 조사단은 홍종인 회장을 대장으로 35명이 참가했으며 최초로 독도의 서도와 동도를 암벽등반 해 측량에 성공했다. 당시 사진담당 대원으로 참가했던 김한용 선생 촬영
한국산악회(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함께 조선산악회에서 개명)는 1947년 첫 독도 탐사 이후 1952년 9월과 1953년 10월에도 독도를 찾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1947년 조사보고서를 바탕으로 1952년 2월 해양주권선언과 독도영유권 선언을 하게 되었다. 1953년 조사단은 홍종인 회장을 대장으로 35명이 참가했으며 최초로 독도의 서도와 동도를 암벽등반 해 측량에 성공했다. 당시 사진담당 대원으로 참가했던 김한용 선생 촬영
한국산악회(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함께 조선산악회에서 개명)는 1947년 첫 독도 탐사 이후 1952년 9월과 1953년 10월에도 독도를 찾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1947년 조사보고서를 바탕으로 1952년 2월 해양주권선언과 독도영유권 선언을 하게 되었다. 1953년 조사단은 홍종인 회장을 대장으로 35명이 참가했으며 최초로 독도의 서도와 동도를 암벽등반 해 측량에 성공했다. 당시 사진담당 대원으로 참가했던 김한용 선생 촬영
한국산악회(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함께 조선산악회에서 개명)는 1947년 첫 독도 탐사 이후 1952년 9월과 1953년 10월에도 독도를 찾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1947년 조사보고서를 바탕으로 1952년 2월 해양주권선언과 독도영유권 선언을 하게 되었다. 1953년 조사단은 홍종인 회장을 대장으로 35명이 참가했으며 최초로 독도의 서도와 동도를 암벽등반 해 측량에 성공했다. 당시 사진담당 대원으로 참가했던 김한용 선생 촬영
한국산악회(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함께 조선산악회에서 개명)는 1947년 첫 독도 탐사 이후 1952년 9월과 1953년 10월에도 독도를 찾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1947년 조사보고서를 바탕으로 1952년 2월 해양주권선언과 독도영유권 선언을 하게 되었다. 1953년 조사단은 홍종인 회장을 대장으로 35명이 참가했으며 최초로 독도의 서도와 동도를 암벽등반 해 측량에 성공했다. 당시 사진담당 대원으로 참가했던 김한용 선생 촬영
한국산악회(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함께 조선산악회에서 개명)는 1947년 첫 독도 탐사 이후 1952년 9월과 1953년 10월에도 독도를 찾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1947년 조사보고서를 바탕으로 1952년 2월 해양주권선언과 독도영유권 선언을 하게 되었다. 1953년 조사단은 홍종인 회장을 대장으로 35명이 참가했으며 최초로 독도의 서도와 동도를 암벽등반 해 측량에 성공했다. 당시 사진담당 대원으로 참가했던 김한용 선생 촬영
한국산악회(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함께 조선산악회에서 개명)는 1947년 첫 독도 탐사 이후 1952년 9월과 1953년 10월에도 독도를 찾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1947년 조사보고서를 바탕으로 1952년 2월 해양주권선언과 독도영유권 선언을 하게 되었다. 1953년 조사단은 홍종인 회장을 대장으로 35명이 참가했으며 최초로 독도의 서도와 동도를 암벽등반 해 측량에 성공했다. 당시 사진담당 대원으로 참가했던 김한용 선생 촬영
한국산악회(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함께 조선산악회에서 개명)는 1947년 첫 독도 탐사 이후 1952년 9월과 1953년 10월에도 독도를 찾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1947년 조사보고서를 바탕으로 1952년 2월 해양주권선언과 독도영유권 선언을 하게 되었다. 1953년 조사단은 홍종인 회장을 대장으로 35명이 참가했으며 최초로 독도의 서도와 동도를 암벽등반 해 측량에 성공했다. 당시 사진담당 대원으로 참가했던 김한용 선생 촬영
한국산악회(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함께 조선산악회에서 개명)는 1947년 첫 독도 탐사 이후 1952년 9월과 1953년 10월에도 독도를 찾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1947년 조사보고서를 바탕으로 1952년 2월 해양주권선언과 독도영유권 선언을 하게 되었다. 1953년 조사단은 홍종인 회장을 대장으로 35명이 참가했으며 최초로 독도의 서도와 동도를 암벽등반 해 측량에 성공했다. 당시 사진담당 대원으로 참가했던 김한용 선생 촬영
한국산악회(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함께 조선산악회에서 개명)는 1947년 첫 독도 탐사 이후 1952년 9월과 1953년 10월에도 독도를 찾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1947년 조사보고서를 바탕으로 1952년 2월 해양주권선언과 독도영유권 선언을 하게 되었다. 1953년 조사단은 홍종인 회장을 대장으로 35명이 참가했으며 최초로 독도의 서도와 동도를 암벽등반 해 측량에 성공했다. 당시 사진담당 대원으로 참가했던 김한용 선생 촬영
한국산악회(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함께 조선산악회에서 개명)는 1947년 첫 독도 탐사 이후 1952년 9월과 1953년 10월에도 독도를 찾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1947년 조사보고서를 바탕으로 1952년 2월 해양주권선언과 독도영유권 선언을 하게 되었다. 1953년 조사단은 홍종인 회장을 대장으로 35명이 참가했으며 최초로 독도의 서도와 동도를 암벽등반 해 측량에 성공했다. 당시 사진담당 대원으로 참가했던 김한용 선생 촬영
한국산악회(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함께 조선산악회에서 개명)는 1947년 첫 독도 탐사 이후 1952년 9월과 1953년 10월에도 독도를 찾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1947년 조사보고서를 바탕으로 1952년 2월 해양주권선언과 독도영유권 선언을 하게 되었다. 1953년 조사단은 홍종인 회장을 대장으로 35명이 참가했으며 최초로 독도의 서도와 동도를 암벽등반 해 측량에 성공했다. 당시 사진담당 대원으로 참가했던 김한용 선생 촬영
한국산악회(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함께 조선산악회에서 개명)는 1947년 첫 독도 탐사 이후 1952년 9월과 1953년 10월에도 독도를 찾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1947년 조사보고서를 바탕으로 1952년 2월 해양주권선언과 독도영유권 선언을 하게 되었다. 1953년 조사단은 홍종인 회장을 대장으로 35명이 참가했으며 최초로 독도의 서도와 동도를 암벽등반 해 측량에 성공했다. 당시 사진담당 대원으로 참가했던 김한용 선생 촬영
한국산악회(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함께 조선산악회에서 개명)는 1947년 첫 독도 탐사 이후 1952년 9월과 1953년 10월에도 독도를 찾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1947년 조사보고서를 바탕으로 1952년 2월 해양주권선언과 독도영유권 선언을 하게 되었다. 1953년 조사단은 홍종인 회장을 대장으로 35명이 참가했으며 최초로 독도의 서도와 동도를 암벽등반 해 측량에 성공했다. 당시 사진담당 대원으로 참가했던 김한용 선생 촬영
한국산악회(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함께 조선산악회에서 개명)는 1947년 첫 독도 탐사 이후 1952년 9월과 1953년 10월에도 독도를 찾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1947년 조사보고서를 바탕으로 1952년 2월 해양주권선언과 독도영유권 선언을 하게 되었다. 1953년 조사단은 홍종인 회장을 대장으로 35명이 참가했으며 최초로 독도의 서도와 동도를 암벽등반 해 측량에 성공했다. 당시 사진담당 대원으로 참가했던 김한용 선생 촬영
한국산악회(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함께 조선산악회에서 개명)는 1947년 첫 독도 탐사 이후 1952년 9월과 1953년 10월에도 독도를 찾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1947년 조사보고서를 바탕으로 1952년 2월 해양주권선언과 독도영유권 선언을 하게 되었다. 1953년 조사단은 홍종인 회장을 대장으로 35명이 참가했으며 최초로 독도의 서도와 동도를 암벽등반 해 측량에 성공했다. 독도에 일본인들이 설치했던 다케시마 표목. 대원들은 이를 뽑아내고 독도 표지석을 설치했다. 당시 사진담당 대원으로 참가했던 김한용 선생 촬영
한국산악회(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함께 조선산악회에서 개명)는 1947년 첫 독도 탐사 이후 1952년 9월과 1953년 10월에도 독도를 찾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1947년 조사보고서를 바탕으로 1952년 2월 해양주권선언과 독도영유권 선언을 하게 되었다. 1953년 조사단은 홍종인 회장을 대장으로 35명이 참가했으며 최초로 독도의 서도와 동도를 암벽등반 해 측량에 성공했다. 독도에 일본인들이 설치했던 다케시마 표목. 대원들은 이를 뽑아내고 독도 표지석을 설치했다. 당시 사진담당 대원으로 참가했던 김한용 선생 촬영
고 김한용 선생.
고 김한용 선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