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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임일진, 알피니즘이라는 이름의 막차에 오른 카메라맨
[리뷰] 임일진, 알피니즘이라는 이름의 막차에 오른 카메라맨
  • 이영준 기자
  • 승인 2019.09.09 23: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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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피니스트-어느 카메라맨의 고백』에 대하여

2019울주세계산악영화제가 기다려졌던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에서도 고(故) 임일진 감독(1969~2018)의 영화 『알피니스트』(2016)를 재편집해 월드 프리미어로 개봉하는 김민철 감독의 『알피니스트-어느 카메라맨의 고백(Alpinist - Confession of a Cameraman)』(2019)이 가장 궁금했기 때문이다.

결국 영화 상영과 씨네토크가 열리던 7일 밤을 기다리지 못하고 아침 프레스룸이 문을 열자마자 모니터 화면으로 영화를 보고나서 담배 한 대를 물곤 김민철 감독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늘 밤엔 술 한잔 아니 마실 수 없겠노라고.

영화 『알피니스트-어느 카메라맨의 고백』 스틸컷. 고 임일진 감독.
영화 『알피니스트-어느 카메라맨의 고백』 스틸컷. 고 임일진 감독.

 

2016년 울주세계산악영화제에서 『알피니스트』가 처음 스크린에 걸렸을 때, 영화를 보고 나서 임일진, 김민철 감독과 나는 구석의 야외 데크에 앉아 인터뷰를 빙자해 새우깡에 소주를 마셨고 “대체 이런 영화 왜 만든 거요?”라고 시작된 나의 질문에 “너희의 산은 거짓”이라고 답했던 감독 임일진의 이야기는 세상에 대한 욕지거리로 밤새 이어졌다.

영화 『알피니스트-어느 카메라맨의 고백』 스틸컷.

『알피니스트』의 처음 제목은 ‘너희의 산은 거짓이다’였는데, 그건 10여 년 전에 『마운틴』지에서 노고산 자락 지축동의 비닐하우스에 살던 전위예술가 무세중 선생을 인터뷰하며 데스크였던 내가 기사에 달았던 제목이었다.

오래 전 무세중 선생이 『사람과 산』 창간호에 한국의 산과 무속신앙에 대한 칼럼을 기고한 것을 읽었던 기억이 있어 전위예술과 알피니즘의 닿는 부분을 물어물어 찾아갔던 터인데, 한 번의 인터뷰로는 궁금증이 풀리질 않아 나는 그에 대해 쓴 『무세중의 전위예술-충돌50년』이라는 두꺼운 책을 사서 읽던 중이었다.

임일진 감독이 집어간 책
임일진 감독이 집어갔던 『무세중의 전위예술-충돌50년』

그런데 어느 날 잠시 자리를 비웠다 돌아오니 책상에는 ‘이영준 기자, 기다리다 너무 읽고 싶어서 허락도 안 받고 빌려갑니다-임일진’이라는 쪽지가 남겨있고 그 책은 사라져버렸다.

책의 행방이 어디로 갔는지는 이제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임일진 감독의 작품세계에 무당 ‘무(巫)’자가 적셔들어 산에서 죽어간 이들의 원혼을 달래는 굿판이 되었나, 벽에서 떨어져 나간 돌덩이가 세상과 충돌하며 발광하는 불꽃 김형일과 장지명(2011년 네팔 촐라체 북벽에서 추락사), 장작에 타오르는 서성호(2013년 김창호와 에베레스트 무산소 등정 후 사우스콜에서 사망)의 마지막 모습에서 풍겨나는 짙은 화약 냄새가 『알피니스트』 90분 내내 진동하고 있었다.

영화 『알피니스트-어느 카메라맨의 고백』 스틸컷.

임일진 감독은 한동안 한국의 젊은 알피니스트들의 활동을 기록하는 걸로 밥을 먹고 살았다. 히말라야 원정대에 동행해 그들의 스폰서를 위한 방송용 다큐멘터리를 촬영하며 자신의 이력을 쌓았고 그 화면은 태극기와 와펜이 누더기처럼 덕지덕지 붙은 씬으로 채워졌다.

임 감독은 늘 나이가 적은 나에게도 말을 높이는, 예의가 바른 사람이었지만 불콰해지면 이러한 자신의 모습이 진짜가 아니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면서도 그는 아웃도어 브랜드 홍보영상을 제작하는 사무실을 차렸다며 일감을 구해달라고 나를 찾아오기도 했고, 그의 두 가지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그가 어떤 지독한 콤플렉스와 분열을 앓고 있거나 아니면 아슬아슬한 작두 위에 서 있는 무당처럼 전위의 줄타기를 하고있는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영화 『알피니스트-어느 카메라맨의 고백』 스틸컷.

『알피니스트』는 여러 사람을 불편하게 했던 영화였다. 울주에 이어 서울에서의 시사회가 끝나고 어떤 관객은 “한번도 안본 사람은 있어도 한번만 보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는 평을 남기기도 했다. “너희의 산은 거짓”이라는 인터뷰 기사가 나간 뒤 기사에 등장했던 임 감독의 친구 산악인 김창호(1969~2018)는 나에게 전화를 해 스폰서들로부터 곤란한 말을 듣고 있다며 “그 알코올 중독자 같은 놈의 인터뷰를 그대로 실으면 어떡하냐”고 화를 내기도 했었다.

그 불편함이란 누군가에겐 벌거벗겨진 것과도 같았을 테지만, 나는 미디어에 투영된 등정의 가치가 마치 벌거벗은 임금님을 바라보는 내부자들의 시선, 그리고 그들의 카르텔로 겹겹이 쌓아올린 거대한 시뮬라크르, 이미지화된 인공의 산을 우리가 오르려고 하는 건 아닌가라고 느낀 적이 많았던 것이 사실이다. 때로 목숨까지 내던지며 말이다.

감독 임일진은 그 무리 속에서 “임금님이 벌거벗었잖아!”라고 외친 소년이 되고 싶었는지도.

9월 7일 울주세계산악영화제에서 열린 임일진 감독 씨네토크.
9월 7일 울주세계산악영화제에서 열린 임일진 감독 씨네토크.

김민철 감독은 임일진 감독이 자신을 알코올 중독자 같은 놈이라 부르던 대장 김창호와 구르자히말로 떠나기 이틀 전 인수봉이 올려다 보이는 그의 집을 찾아가 하루 종일 이야기를 나누다 술을 마시다 담배를 피우다 설악가를 부르다 눈물 짓기도 하며 ‘어느 카메라맨의 고백’을 기록했고 이제 다시 그의 기억을 세상에 끄집어낸다.

“히말라야 가서 수염은 왜 길러요? 찝찝하게. 전기면도기로 깎으면 되지”라고 말하는 임일진 감독의 목소리엔 이미 소주가 두어 병쯤 섞여 흘러나오는 것 같다.

알피니즘이라는 이름의 막차 맨 마지막 칸에 카메라를 들고 힘겹게 올라섰던 감독 임일진.  구르자히말에서 산산이 부서진 그의 짐벌이 나의 책상에 놓여있는지 어느덧 일 년이다.

구르자히말에서 돌아온 임일진 감독이 쓰던 짐벌
구르자히말에서 돌아온, 임일진 감독이 쓰던 짐벌

불온한 전위는 길을 내고 사라졌다. 하지만 길은 남았다.

우리가 우리 시대의 막차라 믿었으나 다시 또 왔던 그것처럼, 언젠가 어느 날 다시 누군가 또 다른 막차의 맨 마지막 칸에 힘겹게 오를 테고, 길은 방향을 알 수 없는 어딘가로 생겨날 것이다.

*『알피니스트-어느 카메라맨의 고백』은 경기영상위원회 등 여러 기관들에서 지원을 받아 상영관 개봉을 목표로 하고 있다. 시사회는 마운틴저널과 함께 하기로 했으며 일정은 공지 예정, 목표는 소박하게도 2만 관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