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19-11-13 19:05 (수)
“그녀의 에너지가 여러 사람들에게 전해지길”
“그녀의 에너지가 여러 사람들에게 전해지길”
  • 이영준 기자
  • 승인 2019.10.18 00:0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여성 첫 황금피켈상 수상자 다니구치 케이 평전 『태양의 한조각』 저자 오이시 아키히로

2008년 가을, 인도 카메트(7756m) 남동벽을 알파인 스타일로 오르며 프랑스 『몽타뉴』지가 선정하는 황금피켈상을 세계 처음으로 받은 여성이 있다. 일본 등반가 다니구치 케이(1972~2015).

하지만 그녀는 이러한 자신을 둘러싼 수사에 아무런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다.

황금피켈상이란 자신의 방 한쪽을 꾸미는 장식품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 케이는 이후로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파키스탄과 티베트로, 북미와 알래스카로 방랑의 길을 계속 걷다 2015년 12월 21일, 킬리만자로 가이드산행을 며칠 앞두고 훗카이도 다이세츠산 구로다케(1984m) 정상에서 추락해 세상을 떠났다.

2000년 케이오산악회에 입회해 등반을 시작한 지 15년, 태양의 한 조각처럼 뜨거웠던 삶이었다.

내년 1월 하루재클럽에서 출간을 앞두고 있는 다니구치 케이 평전 '태양의 한 조각'
내년 1월 하루재클럽에서 출간을 앞두고 있는 다니구치 케이 평전 '태양의 한 조각'

지난 1월 일본에서 출간돼 지금까지 5천여 권이 판매된 다니구치 케이의 평전 『태양의 한조각(太陽のかけら)』이 김영도 선생의 번역으로 내년 초 하루재클럽에서 한국 출간을 앞두고 있는 가운데 저자 오이시 아키히로 씨가 한국을 찾았다.

도착한 다음 날, 인수봉 크로니 길을 등반하고 내려온 그는 변기태 하루재클럽 대표와 김동수 씨와 함께 우이동 마운틴저널 사무실 바닥에 침낭을 깔고 잤다. 그 다음날도 취나드A코스를 등반하고 다음날에는 선인봉을 기자와 함께 올랐다.

인수봉 앞에 선 오이시 아키히로
인수봉 앞에 선 오이시 아키히로

악수를 하면 굵게 잡히는 손무더기가 영락 없는 산악인인 그는 생전 다니구치 케이와 몇 차례 줄을 묶은 경험만 있을 뿐이지만 케이의 죽음을 접하고 곧바로 그의 발자취를 책으로 남겨야겠다고 생각해 2년여 간의 취재를 거쳐 올해 초 『산과 계곡』사를 통해 책을 펴냈다.

선인봉으로 향하는 그에게서는 지친 기색을 찾아볼 수 없었다. 느지막한 시간, 함께 박쥐길을 등반하며 나는 그에게 이런저런 질문들을 해보려 했지만 이내 그것이 상투적인 질문 이상의 것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로프 끝에서 느껴지는 서로의 감각만이 다니구치 케이라는 우리 둘 간의 공통점을 잇는 클라이머의 대화였다.

2011년 1월 다니구치 케이가 한국을 찾았을 때 나는 함께 토왕성폭을 등반한 적이 있었다. 그때 역시 그녀에게 별다른 질문을 하지 않았고, 그저 묵묵히 배낭을 메고 눈 쌓인 토왕골을 오르며, 로프를 사리고 줄을 당기거나 뜨거운 차 한잔을 나누었던 것이 전부였다.

그때 함께 했던 김형일과 장지명도 그해 가을 촐라체 북벽에서 고인이 되었고, 케이도 마찬가지이니 저들은 그곳에서 만나 또 무슨 산을 오를 궁리를 하고 있을까.

2011년 1월 토왕성폭 앞에서 한국 산악인들과 함께한 다니구치 케이.(가운데 파란 헬멧) 

 

“다니구치 케이의 에너지를 여러 사람들이 함께 느끼고 생각하는 기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올 겨울에 아내와 함께 한국을 다시 찾아 빙벽을 오르고 싶군요.”

오이시 아키히로는 아세아대학 산악부에 들어가며 산을 배웠다. 7대륙 최고봉을 등정하고 히말라야 청소등반가로 유명한 노구치 겐이 그의 산악부 선배다. 스물 한 살때 초오유를 올랐으며, 그때 쓴 등반기가 인연이 되어 『산과 계곡』에서 2년간 편집 일을 했다. 지금은 고향인 시즈오카에서 가스배달 사업을 한다는 그는 부업 아닌 부업으로 글을 쓴다. 서른 살에 다니구치 케이를 만났고, 그로부터 등산의 방법과 정신을 다시 배웠다는 오이시는 다니구치의 마지막 히말라야였던 네팔 판도라(6850m)를 내년에 등반할 계획이다.

『태양의 한조각』에 등장하는 다니구치 케이의 편지 한 구절을 공개한다. 그녀가 고등학교 때 자신의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다.

"그런데 대학에서 4년간 편히 지내기 위해서 지금 이 소중한 시간을 의미 없는 공부로 보낸다는 것은 바보스러운 일입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살고 있는지 진지하게 생각해보기나 했을까. 자기가 인간이라는 것을 생각이나 해보았을까. 이 지구에 살고 있는 것은 인간만이 아니라는 것을, 그리고 인간의 본성이라든가 등등에 대해 생각이나 하고 있는 것일까요... 일직선으로 강을 내려가기보다는 강의 흐름을 따라 구불구불 이리저리 굽어가며 전진하는 것도 재미있습니다. 실패할지도 모르며 좌절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래도 그런 삶의 길이 내 마음에 듭니다."

오로지 인간 스스로의 길, 그 길을 고민하며 걸어왔던 다니구치 케이의 발자취가 저자 오이시 아키히로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는 건 나만 느낀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진정한 등산가란 하나의 방랑자라는 머메리의 말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