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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반 슈즈 이야기
카라반 슈즈 이야기
  • 이영준
  • 승인 2018.02.07 2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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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국민 등산화 카라반... 1952년부터 일본 마나슬루 원정대 사용 계기 개발

조미료 제품명 ‘미원’이나 굴삭기 브랜드 ‘포클레인’처럼 등산에서도 특정 브랜드 또는 제품명이 그 전체를 이르는 말로 굳어진 것들이 있다. 예를 들면 70~80년대 우리나라 산악인들에게 애용되었던 ‘키슬링’이라는 배낭이나 경등산화를 뜻하는 ‘카라반 슈즈’가 그런 말이다.

그리고 그 둘 사이에는 ‘마키 유코’라는 이름을 빼놓을 수 없다.

아이거 미텔레기 능선 등반 때의 마키 유코(가운데)
아이거 미텔레기 능선 등반 때의 마키 유코(왼쪽 두 번째)

일본은 1896년 영국 선교사 월터 웨스턴의 북알프스 등반과 1905년 일본산악회의 창립 이후 1990년대까지 근 100여 년 꾸준히 등산문화가 발전하고 외형이 성장해왔다. 20세기 초중반 이미 러일전쟁과 중일전쟁, 태평양전쟁을 거치며 일본은 계속 전쟁 중에 있었지만 한편으로 정치적 유대관계에 있던 독일 등 유럽 산악선진국과의 교류를 통해 알피니즘과 등산이라는 새로운 현대의 문화가 자리잡아 간 것. 또 메이지 유신 이후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청년이여 야망을 가져라’와 같은 기풍이 불어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도전과 대자연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독려하는 사회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마키 유코(1894~1989)는 그런 세상을 살아갔던 산악인이었다. 이미 10살 때 후지산에 오른 그는 1919년 일본 게이오대학에 입학해 산악부를 창설했다. 일본산악회 회원으로도 활동한 마키 유코는 1919년부터 1921년까지 스위스에 머물며 알프스의 여러 봉우리들을 등반했으며 그중에는 아이거(3970m) 북동릉 초등도 있었다. 일약 일본 내에서 유명해진 마키 유코는 귀국 길에 배낭 하나를 들고 오는데, 그것은 그린덴발트 마을의 요하네스 키슬링이라는 배낭제작소 주인이 만든 것이었다. 마키 유코는 이를 도쿄의 카타기리 배낭제작소에 건넸으며, 이후 ‘키슬링형 배낭’으로 재탄생해 1980년대까지 일본과 한국의 산악인들에게 애용되며 그런 형태의 모든 배낭을 일컫는 하나의 대명사로 굳어지게 된다.

마키 유코는 이후 다이쇼 일왕의 둘째 아들 치치부 왕자의 후원을 받아 1925년 캐나다 로키 산맥의 앨버타 산(3919m)를 초등하고 1926년에는 왕자와 함께 마터호른(4477m)를 오르기도 했다. 1920년대 일본 산악계의 영웅이었던 마키 유코는 자연스레 보다 높고 험한 히말라야에 도전하고 싶어 했지만 세계대전의 발발로 1940년대를 지나기까지 이렇다 할 산행을 하지 못했다.

1956년 5월 9일 이마니시 도시호 대원과 마나슬루 정상에 선 걀젠 노르부 셰르파.
1956년 5월 9일 이마니시 도시호 대원과 마나슬루 정상에 선 걀젠 노르부 셰르파.

하지만 전쟁 이후 세계적으로 서구 열강의 8000m급 14봉 초등정 열풍이 불며 일본도 패전국의 오명을 딛고 사회를 환기시키며 다시 일어설 전환점이 필요했다. 1952년부터 마키 유코를 회장으로 히말라야 위원회를 구성하고 추진해온 일본산악회 마나슬루(8156m) 원정은 그런 배경이 있었다.

1953년과 1954년 1, 2차 원정대가 정찰을 마치고 3차 원정은 1956년 봄으로 계획되었다. 대장은 이미 환갑을 훌쩍 넘긴 마키 유코. 노장의 그였지만 경험과 통솔, 그리고 치밀한 계획에서 그를 따를 사람이 일본에는 없었다.

대원 12명과 셰르파 20명으로 구성된 마나슬루 원정대는 1950년 영국의 하워드 틸만이 이 지역을 처음 탐사한 이래 불과 네 번째 그곳을 찾은 외지인이었다.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는 탐험이었으며, 때문에 베이스캠프를 찾아가는 여정은 마나슬루의 정상에 오르는 일보다도 어려웠을 지도 모른다.

마키 유코는 이 긴 카라반의 과정에서 대원과 셰르파가 편하게 걸을 수 있는 새로운 등산화가 필요했다.

당시까지 등산화라고 하면 두꺼운 가죽으로 제작하고 아웃솔 역시 가죽을 여러 겹으로 덧대 붙이고 트리코니와 같은 무거운 징이 박힌 것들이 전부였다. 등산화 한짝의 무게가 4kg에 육박했으니, 열대 기후인 포카라에서부터 안나푸르나 협곡의 밀림을 지나는 데에는 이런 등산화는 필요치 않았다.

마키 유코는 게이오대학 산악부 후배이자 함께 일본산악회에서 활동하며 히말라야 위원회의 장비 담당이던 사토 규이치로에게 새로운 ‘카라반 슈즈’ 제작을 의뢰하는데, 요구사항은 간단했다.

‘가볍고, 편하고, 바위에서 미끄러지지 않으며 튼튼할 것.’

카라반 슈즈를 개발하고 1954년 카라반을 설립한 사토 규이치로.
카라반 슈즈를 개발하고 1954년 카라반을 설립한 사토 규이치로.

사토는 무게를 줄이기 위해 새로운 소재를 찾았고 그것은 가죽만큼 내구성이 있고 무게는 절반도 되지 않은 캔버스 천과 우수한 마찰력을 지닌 고무였다. 하지만 고무로 된 아웃솔과 천으로 된 등산화의 외피를 결합하는 일은 당시의 기술력으로서는 시도된 적이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사토는 산악부 동문이 일하고 있던 후지쿠라 고무공업사를 찾아가 캔버스 천과 고무 밑창의 완벽한 접착을 위한 실험을 계속해 결국 1953년 제1차 마나슬루 정찰대에서 사용할 첫 번째 시제품을 완성하기 이른다.

원정대원들은 새로운 ‘카라반 슈즈’에 대해 호평했고 결국 1956년 일본 마나슬루 원정대가 세계 8위봉의 정상에 서며 일본은 일약 전국적인 등산 붐이 일게 되는데, 사람들의 관심이 쏠린 것도 바로 ‘카라반 슈즈’였다.

일본 마나슬루 원정대의 카라반 슈즈 시제품. 사진 코리아티씨
일본 마나슬루 원정대의 카라반 슈즈 시제품. 사진 코리아티씨

전문산악인이 아닌 하이킹 위주의 등산에서 유럽의 만년설에서 신던 전통적인 중등산화는 필요치 않았다. 수목한계선을 조금 넘어서는 일본의 산들에서는 가볍고 편하며 마찰력이 좋은 등산화가 더 유용했고 이는 ‘카라반 슈즈’가 일본 ‘국민등산화’로 자리 잡는데 가장 결정적인 열쇠가 되었다.

우리나라 역시 1960년대 이후 일본에서 많은 등산문화가 유입되며 ‘카라반 슈즈’라는 말은 천으로 된 가벼운 경등산화를 모두 일컫는 용어로 자리 잡았다.

1964년 7월 25일자 경향신문에는 여름을 맞아 ‘젊음을 부르는 산과 바다’라는 기사를 내는데, ‘등산10훈’에서 등산화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등산화는 등산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다. 초심자들에게는 카라반 슈즈가 적당하다.’

1964년 7월 25일자 경향신문
1964년 7월 25일자 경향신문

코리아티씨(http://caravan-web.co.kr)에서 국내 전개하는 브랜드 ‘카라반’이 바로 이 카라반 슈즈다.